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쉐량 (문단 편집) === 만주사변과 부저항 장군 === [[만주사변]] 당시 동북군에게 내렸던, '저항하지 말고 관동군에게 협조하라'라는 부저항 명령 때문에 만주 전역을 일본에게 빼앗긴 점에 대해서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부저항'이란 꼬리표가 아직도 유행할 정도다. 흔히 [[원균]] 하면 누구든 [[칠천량 해전|칠천량 참패]]를 떠올리듯, 장쉐량 하면 '부저항 장군'으로 통하는 급으로 낙인이 찍혀 버린 것이다. 장쉐량은 질은 처참했으나 어쨌든 규모만은 거대했던, 정규군만 30만명 규모의 최대 군벌세력인 동북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0명 수준의 관동군 침략에 무대책으로 방관했다. 요충지가 시시각각으로 함락됨에도 상황 파악은 하지 않고 늘상 있던 국지도발에 불과할 것이라 치부하며 외교적 협상에만 지나치게 목을 맸다. 기도 메타에 올인하며 그야말로 우유부단하고 지리멸렬한 대응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공업력의 코어였던 만주를 순식간에 실함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장쉐량이 군벌로서 동북 지방은 팽개친 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화북 지방의 땅따먹기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행보라고 욕을 먹는 부분이다. 장쉐량은 수하들의 봉천 복귀 권유도 무시하고[* 장쭤샹 같은 동북군 원로들은 관동군의 동태가 심상찮음을 보고하며 봉천 복귀를 지속적으로 권유했다.] 동북군의 기량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것도 방치한 채[* [[봉소전쟁|장쉐량은 집권 초기 소련을 상대로 군사적 모험을 걸어댔는데 처참하게 발렸다]]. 관동군 관전무관에게 오합지졸 잡군이라는 비아냥을 살 정도였다.] 주력 부대 절반을 [[베이징시|베이핑]]에 박아두고 있었다. 동북 지방에 잔류한 부대는 질이 형편없었고 만주의 상황이 심각함에도 주력부대는 북경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관에 더한 부저항 지시 때문에 그나마 전투력이 있는 동북군들도 제대로 된 대응이 되지 않은 채 처참하게 박살이 나버리거나 관동군에 고스란히 항복했으며 전쟁 발발 이후 고작 몇개월 만에 만주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중국은 만주 상실로 인해 중국 최대 규모[* 만주는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큰 공업지대였다.]의 수많은 중공업 시설과 군수품 생산단지, 전략적 요충지를 날려먹음으로서 전쟁 동력에 크나큰 데미지를 입게 되었다. 거의 중국을 팔아먹은 [[매국노]]로 봐도 될 정도의 행적이다. [[시안 사건]] 당시 장쉐량이 내세운 명분이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일제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항일투사 코스프레는 실컷 하는 인간이 정작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내렸던 명령은 일본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장쉐량이 적극적으로 나라를 망칠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내릴 수가 없는 미스테리한 명령이다. 장쉐량 본인도 '당시 일본의 의도를 몰라서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나의 책임이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책임을 인정했다. 시안 사건에서 내세웠던 장쉐량의 항일 명분은 정말 코스프레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장쉐량은 일본은 무서워하면서도 훈련 등의 군대 강화 노력 역시 도외시했다. 아버지 [[장쭤린]]을 [[황고둔 사건|폭사시킨 게]] 일본인데 복수를 위한 군비 강화와 군제개혁은 커녕 일본 영사에게 친일 약속이나 해대며 군벌의 생존을 위한 줄타기만 하던 게 장쉐량이었다. 이 때문에 만주사변 막바지인 1931년 말 관동군의 남하 상황에서 국민정부의 항전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쉐량의 선택은 오로지 후퇴 뿐이었고, 관동군은 진저우에서 무혈입성했다. 더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장쉐량이 국민정부의 중앙군 북상 제안을 얼버무리는 식으로 거절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화북 세력권이 침탈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물론 만주사변 이후 시점에선 장쉐량과 동북정권이 꿔다놓은 보릿자루만도 못한 한심한 능력을 보인 탓에 일본이 굳이 장쉐량과 협상해 줄 이유가 없었다. 줘패고 땅이든 이권이든 강탈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즉, 부저항과 굴종으로 일본을 달래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쉐량의 생각은 그저 망상에 불과했다. 만주 사변 이후에도 장쉐량은 자기 세력권 보존과 병력 아끼기에만 몰두하며 군벌스러운 행태만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장쉐량은 [[시안 사건]]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상관인 장제스를 납치, 구금하여 공산당 토벌 중단과 일본과의 결전을 강요하였다. 결국 공업력과 공세 역량을 성장시키며 전선을 유지하다가 1940년 이후에 만주를 수복하려 했던 장제스의 대전략은 어긋났으며, 그 때문에 [[중일전쟁]]에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게 되었다. [[후스]]가 당시 중국이 일본과 싸울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고 지적한 것처럼 개전시점이 완전히 어긋나 독소전에서의 소련과 같은 참담한 패전을 수도 없이 겪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섬멸 직전의 위기에 몰려 위태로웠던 공산당이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고 중일전쟁 이후 공산당이 승리하는 발판이 되었다. 장쉐량의 저자세 외교는 극히 호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일본 군부에 더더욱 극도의 저자세 외교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을 가져오고 말았다. 일단 장쉐량의 동북정권은 근본 자체가 일본에 의존적이었다. 동북정권이 만주, 화북을 아우르는 거대 군벌로 성장하는 데에 일본의 지원이 핵심적 역할을 했고, 이건 부친 [[장쭤린]]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쭤린은 지속적으로 일본에 이권을 뜯겨왔고, 종국에는 반쯤 조종당하시다시피 하는 처지로 전락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장쭤린은 여기에 저항하다가 일본에 폭사를 당해버렸다. 그러나 동북정권은 창업자의 폭사라는 전무후무한 사태를 목도하고도 복수는 커녕 여전히 일본에 굴종하며 장제스와 일본 사이에서 간을 볼 뿐이었다. 동북정권의 수뇌부엔 친일 성향의 인물들이 수두룩하게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징후이]] 같은 원로들은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에 적극 협력하며 만주국 성립 이후 총리가 되기까지 했다. 또한 장쉐량은 [[소련]] 등의 열강에 처참하게 깨지는 동북군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관계를 이어오고 있던 일본에 대한 외교적 협상 외의 다른 해결책을 전혀 모색하지 않았다. 다만 [[관동군]]은 일본 본국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광인처럼 날뛰는 상태였으므로 부저항과 협상, 외교적 시도는 전혀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통제는 커녕 일선 지휘관들이 개인의 공적을 위해 자기 맘대로 도발과 침공을 일삼고 정부가 거기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기나 하던 게 일본이었으니 말이다. 최소한 야욕에 불타던 관동군은 절대로 만주 침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부저항 지시를 내려봐야 관동군에 자동문을 열어주기만 할 뿐, 결과적으로는 만주를 송두리째 넘기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장쉐량의 무사안일주의와 극도의 부저항주의가 중일전쟁의 커다란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전쟁만 하면 마치 썩은 짚단 마냥 무너지는 중국군, 전쟁만 하면 늘어나는 영토와 쏟아져들어오는 이권, 전리품, 일본 내부에서도 '[[허수아비(동음이의어)#s-2.1|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중국과는 전쟁 안 하는 게 바보다'라는 확전 여론만 팽창시켰으며, 결국 중일전쟁이 시작될 무렵 일본 본국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즉, 장쉐량이 두번이나 국민당의 발목을 잡은 것은 장제스와 중화민국 정부의 중국 본토 상실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이러니 중국 공산당이 장쉐량을 칭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공산당 측 사관을 거의 그대로 대변하는 [[김용옥]]도 장쉐량과 시안 사건을 대단히 고평가하고 있다. 중국 민족의 좌우 분열을 그치게 하고 단합하여 일제에 항거하게 만든 영웅적 행적으로 평가하는 식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