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소(삼국지) (문단 편집) === [[손권]] 휘하에서 === 장소는 손권을 모시면서도 특유의 신중함으로 국사가 경솔히 이루어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손권의 지배 기반을 든든히 하였다. 손권 역시 장소를 중히 여겨 그가 출정하거나 떠나는 일이 있으면 장소를 항상 후방에 남겨 그에게 정사 일체를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소의 일생이 제대로 꼬이는 사건이 터지는데 208년에 [[조조]]가 유표가 죽어 무주공산이 된 [[형주]]를 함락하고 강동 땅을 노리자 '''주화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에게 대항하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들어 항복을 주장했다.''' 손권은 이러한 주장에 굴복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때 [[노숙(삼국지)|노숙]]이 아무 말 없다가 손권을 따라가 넌지시 그들 모두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신임을 얻었고 노숙이 파양에서 불러들인 [[주유(삼국지)|주유]]가 적극적으로 항전을 주장한 뒤 손유 연합이 기어이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조조군을 격파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항복을 주장하던 장소의 입지가 상당히 축소된건 물론이고, 더 극단적으로 평가하면 숙청만 피했을 뿐 장소의 정치 커리어는 사실상 끝나게 된다. 이에 대해 장소의 의견은 가신의 입장에서 주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긴 주장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두 세력간의 전력 차이는 물론 항복이 한심하다고 욕하기에는 당시 조조의 입장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항복한 [[장수(삼국지)|장수]]와 [[유종(삼국지)|유종]]은 어찌저찌 살아남았지만, 조조에게 항전한 장막의 경우 삼족이 멸족당했고 마찬가지로 [[원소(삼국지)|원소]]의 자식들인 [[원담]],[[원희]],[[원상]]역시 비참하게 죽었다. 전력차가 명백한 상황에서 손권의 후견인 역할을 맡은 장소는 젊은 주군이 당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여지가 있다.원소가 [[유우(삼국지)|유우]]를 추대하려던 시도는 (본인이 거절했기 때문이지만) 실패했고, 원씨 일족은 멸족되었으며, 다른 황실 종친인 [[유표]]나 [[유언(삼국지)|유언]]이 각자 1개 주를 영유하며 사실상 황제놀이를 할지언정 중앙에서의 독립은 포기할 정도며, 요동의 [[공손강]]도 중앙 정부와 대적하는 대신 자치를 인정받는 선에서 만족할 정도인데 하물며 강동은 신흥군벌가문인 손가의 휘하에 지역 호족들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체제인데다가, 방계중의 방계라도 하여간 황족에 의대조라는 명분까지 쥐고 있는 유비와 달리 당대의 상식으로는 황제까지 끼고 있는 허창 중앙 정부에 대해 오랫동안 뻗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서주 출신의 장소가 고향 서주를 쑥대밭으로 만든 조조에게 귀부를 주장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상당한 고뇌를 거친 결정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살아남은 '''장수와 유종의 말년이 편안했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장수는 조조와 조비에게 밉보여서 아예 토사구팽 당했다는게 정설로 받아질 정도고[* 조비에게 하도 갈굼당해서 자살했다는 내용은 위략의 주석으로만 나오는 내용이다만 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게다가 그의 아들 [[장천(삼국지)|장천]]과 장천의 아들까지 위풍의 난에 휘말려 처형당해 대가 끊긴걸 생각하면 거의 빼박이다.] 유종은 살아남긴 했는데 [[유기(삼국지)|유기]]와 함께 싸잡아서 개돼지 취급을 당하였고 거기서 생겨난 고사가 [[돈견]]이라는걸 고려했을때 항복한 손권이라고 딱히 좋은 대접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원소군 포로를 생매장 시킨것이나 [[헌제귀인 동씨]],[[효헌황후 복씨]] 자신에게 도움을 준 [[허유]]까지 죽여버린 조조가 과연 강동의 구심점이 될수도 있는 손권을 언제까지 잘 대해주고 살려둘지도 미지수 였으며 손권이 단순히 일신의 안전만을 생각하기보단 더 큰 뜻을 품고 있었는 데다가 애초에 일신의 안전을 빌미로 그러는 건 [[유장(삼국지)|유장]] 휘하 [[법정(삼국지)|법정]]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합리적 의심|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만 후대사람들이 세력 대 세력으로 보면 곧장 항복하자는 게 이해가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 손권은 조조보다 훨씬 작은 강동의 세력조차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던게 아니었다. 적벽대전 당시 26세가 채 되지 않았던 손권은 세력을 물려받은지 고작 8년이었고, 그 위치도 호족 연합의 수장에 가까웠다. 당시 최소한 양주 전체에 걸쳐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그가 세력의 존망이 달렸는데도 패주하고 달아나던 유비+강하 태수 유기가 모은 것보다 조금 많은 정도의 병사 밖에 모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손권의 벼슬은 토로장군에 불과했다. 삼국시대의 전쟁에서는 명분이 중요했는데, 오의 지배체계가 특히나 느슨했기에 명확한 명분이 없다면 각 지역을 지배하는 호족들로부터 병력을 징발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반대로 손권측과 대적하는 조조군의 병사는 수십만명 이였다.[* 조조 본인은 호왈 80만이라고 큰소리 치긴 했는데 정말 이 정도 병력을 동원했을 가능성은 없고 주유는 조조군은 16만 항복한 유종의 군사는 8만명 정도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최소 15만은 넘는 병력이다.]이 정도이니 포지셔닝을 잘못해 자칫 손권이 '한나라의 승상에 대적하는 역적' 프레이밍을 당해 호족의 지지를 받지도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또한 헌제와 직접적인 인연도 없고 이전까진 딱히 조조를 적대하지 않았던 손권이 이제와 이런 명분을 세우는 것 자체가 애매하다. '니들은 역적이니 황제로 인정할 수 없어' 포지셔닝은 손권이 나중에 양주와 형주, 교주까지 다스리게 된 이후에 잡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손권은 명분이 훨씬 강했던 조위나 촉한에 비해 칭제가 훨씬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니 양주 자체도 느슨하게 지배하던 적벽 직전의 젊은 손권 입장에선 유비가 필요했던 것이다.그리고 적벽대전은 단순히 거대한 적을 맞아 열심히 싸운 전쟁이 아니라, 전쟁을 할 수 있는 준비 자체에 치밀한 외줄타기가 필요했다. 명분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전쟁 시작 전부터 이미 무너질지도 모르며, 전쟁을 치르게 된다고 해도 당시 최강자 조조의 대군과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 게다가 조조는 장료, 장합, 서황 등 항장들이나 가후 등 자신과 적대하다 항복한 이들을 잘 활용했다. 물론 손권은 한 세력의 지배자이긴 했지만 이 시점까지 조조 본인과 딱히 적대한 적도 없으며 정치적 입지가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높지도 않았던 손권을 딱히 숙청할 이유도 없다. 이런 상황이니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장소 입장에선 명분을 세우기도 힘들고 이기긴 더더욱 힘든 전쟁을 해서 젊은 군주를 위험하게 하느니, 차라리 일찌감치 그가 대세에 순응해 안전한 길을 가게 한다는 선택을 한다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장소의 실수라면 손권의 야망과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인데, 사실 후대 사람 입장에서야 훗날 황제가 되는 손권이 조조, 유비와 대등한 입장의 거물로 보이지 당시 손권은 세력을 규합한지도 얼마 안되는데다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만한 강대한 적과도 아직 싸워본 적이 없던 젊은이였다.[* 물론 황조를 토벌하고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자신이 뛰어난 인물이란 건 확실히 입증을 했다. 다만 당시 그의 입지나 위상이 조조와 대적하는게 당연할 정도의 거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장소는 손책이 죽을 때 동생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은 인물이니 좀 더 안전한 길을 선호하는게 자연스럽다. 게다가 장소는 군인이 아닌 정치가인 만큼 항복을 하자는 주장은 그럭저럭 합리적인 선택이였다고 볼수도 있다. 문제는 손권이 장소의 생각보다[* 애초에 장소는 손책의 후계로 처음에는 손익을 밀 정도로 손권의 역량을 낮게 봤으니 의구심을 가질만도 했다.] 훨씬 역량이 더 있는 인물이었고 때문에 [[주유(삼국지)|주유]]의 도움을 받아 [[적벽대전|조조와의 싸움]]을 이기자 적극적으로 화친론을 주장한 장소의 포지션이 난처해졌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적벽대전 승전 이후 장소의 입지가 엄청나게 좁아지긴 했지만 아예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활동했던 기록이 꾸준히 있으며, 적벽의 대승 직후 손권이 합비로 진군한 것에 맞추어 '''장소가 서주로 진군'''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일족들도 [[이궁지쟁]] 이전까지는 꾸준히 정계에서 활약을 했지만, 2인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손권도 장소가 이랬던 것을 내심 언짢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게 장소의 나이가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과 동갑내기라는 점이다. 221년에 위나라에서 사자 [[형정]]을 보내어 손권을 오왕에 봉했을 때 형정이 궁궐 문에 들어서고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으므로, 장소는 형정의 무례함을 꾸짖고 협박하자 형정은 수레에서 곧 내렸다고 한다. 손권이 황제를 칭하게 되자 장소가 손권에게 축하하러 왔는데 손권은 장소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팩트폭력|만약 장공의 계책같이 했다면, 지금쯤 이미 밥이나 빌어먹고 있을 것이오.]]"'''라고 쏘아붙였고, 장소는 땀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고 한다. 처음 승상을 둘 때 여론은 장소였지만 손권은 이를 듣지 않고 [[손소]]를 첫 승상에 삼았다. 손소가 죽고 승상을 새로 임명할 상황이 되자 또 모두가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손권은 "내가 어찌 자포에게 애정을 가지겠소? 승상의 일이 번잡하지만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말하는 바를 따르지 않아 원한과 허물이 장차 생겨나는데, 이를 더할 수는 없소"라고 말하면서 고옹을 등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강표전에서 말하기를 손권이 장소가 항복을 주장하는 일로 그를 꺼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 배송지는 이를 두고 "만약 항복을 했더라면 삼국시대를 거칠 필요없이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었을 테니 좋은 일 아닌가? 장소의 계책은 큰 관점에서 보면 좋은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육손]]과 함께 [[주유(삼국지)|주유]], [[노숙(삼국지)|노숙]], [[여몽]]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이 대화는 여몽전에 있다.] 장소와 진송이 사신을 보내 격문을 받아 영접해야 한다고 같이 말했으나 노숙이 반대하여 이기니 통쾌했다하면서 장소의 이름을 찍어서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권의 측근으로 남아 그를 보좌했는데, 사람됨이 강직하고 엄격했기 때문에 손권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또한 손권은 그를 꺼리기도 하였는데, 장소의 사람이 꼬장꼬장해서 군주인 손권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주로 말싸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장소전에는 위험하게 호랑이 사냥을 하는 손권을 장소가 갈군 일화와, 무창에서 술자리를 갈 때까지 가겠다는 손권을 장소가 갈군 일화도 기록되어있다.] 영감님이 뭘 믿고 그러는지 몰라도[* 사실 장소는 단순한 원로가 아니라 손책이 죽을 때 임명한 탁고대신 이었기에 제아무리 군주인 손권이라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후계자의 자질이 없으면 직접 나라를 취하라'는 유비가 죽을 때 제갈량에게 남긴 말이다. 같은 위치였던 제갈량이 유비가 죽은 후 나라를 거의 통째로 운영했다는 걸 생각하면 저 말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물론 유비가 다 만들어놓은 나라를 물려받기만 한 유선에 비해 손권은 본인이 오를 황제국까지 키웠으니 유선보다 훨씬 입지가 높을 것이고, 장소도 당연히 제갈량 수준의 입지는 되기 힘들다는 차이 정도는 있다. 어쨌거나 아무리 장소가 실책을 범했어도 저런 중요한 대신을 말 좀 고깝게 한다고 맘대로 숙청할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애초 동오가 호족들의 연합체에 가깝게 형성된 나라라, 원래 그 수장 정도였던 손권의 권력은 유비나 조조와 비교하면 군주 그리고 황제치고 상당히 불안정한 편이었다.게다가 항복 권유를 제외하고 보면 능력 자체도 굉장히 우수하니 그럴 이유도 없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모양.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손권이 칭제하자 장소는 늙었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하지만, 정작 촉의 사신이 오에 와서 촉을 찬양할 때 반박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자 손권은 반드시 사신에게 반박했을 장소를 그리워해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공손연]]이 오의 번국이 되기를 청했을 때 손권은 장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신 [[장미(삼국지)|장미]]와 허안을 요동에 보내 공손연을 연왕에 임명하게 했다. 화가 난 장소는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았고, 손권도 화가 나서 장소 집 문을 흙으로 막았다.[* 이 광경을 본 장소 또한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어 흙으로 맞담을 쌓아서 손권에게 제대로 분노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장소의 예측대로 공손연은 장미와 허안을 죽였다. 이후 손권이 장소에게 사과도 하고 구슬려보기도 했지만 영감이 단단히 삐쳤는지 묵묵부답으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 손권이 집에 불을 지르면 나오겠지 하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더니 그래도 끝까지 장소는 집을 나서지 않아서 결국은 아들이[* 이 아들이 장승인지 장휴인지 알수가 없으나 장승은 아버지인 장소를 업기에는 나이가 많고 외지에 파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도에 없고 그 아들이 장휴라는 것에 가능성이 있다.] 장소를 업고 나왔다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나 손권과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숙청되거나 하야하지 않았는데, 이는 손권이 장소를 마냥 아껴서 라기 보다는 손오 체제의 불안정성 덕분에 숙청할 여건이 되지 못했는데다가 본인 역시 체제 안정에 기여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손권 입장에서는 토호를 견제해야 할 카드도 필요했고 말이다. 하여간 이 때문에 장소의 말년 30여년간 두 사람은 정말 많이 티격태격 했다. 손권은 장소에게 '''"오나라의 사대부들은 입궁하면 곧 나에게 절하지만, 출궁하면 곧 그대에게 절한다. 내가 그대를 공경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건만 몇 번이나 백관 한가운데서 나를 꺾으려 든다."(吳國士人入宮則拜孤 出宮則拜君 孤之敬君 亦為至矣 而數於眾中折孤)'''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한 번 이미 군주의 뜻을 배신하고 적에게 항복하자고 권했고, 두 번이나 승상 임명에 퇴짜를 놨으니 권위가 죽을 법한데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부터 닦아놓은 명사의 간판이 워낙 삐까번쩍해서 손권이 없는 궁 밖에서는 사족들의 영수, 리더 대접을 받고 옳은 말이긴 해도 어쨌든 사사건건 자신한테 맞서려고 든다는 점에서는 손권 입장에서 절대로 [[승상]] 같은 더 큰 실권을 줄 수 없고, 줘서도 안 되는 존재였을 법하다. 단지 명성과 여론을 함부로 어쩌긴 어려우니 선 넘을 만하면 적당히 달래면서 의전용, 내정용 트로피로 곁에 둔 것에 가깝다. 국가에는 여러모로 필요한 존재지만 손권 본인에게는 갈수록 정치적 부담이란 점은 말년의 [[육손]]과도 묘하게 포지션이 겹치는데, 그나마 육손과는 달리 군사적 영향력이 없고 + 정치적 실권도 약해서 부담의 레벨은 덜했을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