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샤오셴 (문단 편집) === 죽음 === 1936년 12월 4일, 장제스를 따라 서안을 방문하였다. 12월 12일, [[양후청]]의 초청에 따라 서안성 안의 신성빌딩에서 연회에 참석한 후 서안 시내에서 서안의 전통 경극을 관람하였다. 이날 밤, 장제스의 다른 조카인 장화청과 함께 카드놀이를 하며 서안성 안에서 머무른 장샤오센은 다음날인 12월 13일, [[서안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모르고 장제스가 머물던 화청지로 이동하던 중 동북군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장샤오센은 베이핑에 주둔하던 시절 동북군의 군기를 엄히 다스려 동북군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 장샤오센이 자신의 성명을 말하자 동북군은 즉각 장샤오센을 차에서 끌어내려 "네가 베이핑에서 죽인 수천명의 애국청년의 피값을 치러라!"라고 외치고 총살하였다. 동석했던 장화청은 마침 평상복을 입고 있어서 자신이 그냥 상인이라 둘러대고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다만 차를 타고 도주하려고 시도하다가 사살되었다는 진술도 있었다. 사건 정리 후 중장으로 추서되었고 시신은 고향인 봉화현으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 1948년, 계구 장씨 가문은 <육군중장 장군가전>을 써서 그를 기렸다. 부인 원정지와 첩 육씨 사이에서 3남 4녀를 낳았으며 이중에서 장남 장우륜은 아버지보다 먼저 요절했다. 이후 남편과 사이가 좋았던 원정지는 남편의 복수를 하기 위해 여러차례 [[장쉐량]]을 죽이려 했다고 한다. 한번은 장쉐량의 경호원들에게 체포되었으나 장쉐량이 사정을 알고 풀어주었고 장제스에게도 이를 보고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원정지에게 상하이의 빌딩을 사주어 장효선의 남은 일가가 상하이에서 살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