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사성 (문단 편집) === 장사성의 난 === [include(틀:고려의 대외 전쟁)] 결국 장사성은 1353년 난을 일으켜 그의 아우와 이백승 등 18명과 함께 원나라에 항거하여 태주를 포함한 4개 진을 함락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원 조정에서 장사성에게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장사성은 이를 거절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주(大周), 연호를 천우(天祐)라 하고 자신을 성왕(誠王)이라 칭했다. 1355년 원은 [[탈탈]]을 보내 장사성의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탈탈은 100만 대군을 거병하여 고우를 쳤다. 탈탈은 장사성의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장사성이 성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끔 만들었지만 [[원순제]]가 간신의 말에 넘어가 탈탈의 병권을 박탈하여 탈탈은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장사성의 무리는 탈탈의 군대를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원이 장사성을 치면서 [[고려]]에도 군사를 동원해 지원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군을 지휘한 인물 가운데 [[최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탈탈이 실각하고 원의 군사들이 철수한 뒤에 고려로 돌아온 최영은 탈탈이 병권을 박탈당하고 장사성 진압에 실패한 사실과 원의 개판 오분 전인 상황을 [[공민왕]]에게 아뢰었고, 공민왕은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굳혀 반원자주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1356년 장사성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평강로(쑤저우)를 차지하여 웅평부로 삼고 그곳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장사성의 세력이 날로 커져가자 주원장은 이들 세력에 [[양헌]]을 보내 우호의 뜻을 내비치지만 장사성은 양헌을 돌려보내지 않고 주원장의 세력을 공격한다. 이에 주원장은 [[서달]]을 보내 장사성을 막게 했고 장사성은 용담에서 참패를 당하자 주원장에게 곡식 20만 석과 금은을 바치며 화친을 제안했다. 주원장이 그에게 해마다 곡식 50만 석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양헌을 돌려보내라고 하자 장사성은 이에 답서를 보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