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료 (문단 편집) === [[합비 전투(215년)|2차 합비 공방전]][* 다시 말하지만 아래에 기술된 장료의 비현실적인 전공은 극적 요소가 가미된 연의가 아닌 '정사'에 기술된 내용이다.] === 장료의 명성을 드높여 준 전투가 바로 이 [[합비 전투(215년)|2차 합비 전투]]다. 당시 남쪽의 손권은 [[유비의 입촉|유비의 서촉 정벌]] 이후 형주 남부의 장사, 계양, 영릉 3군 반환 문제로 마찰을 빚던 중 조조가 장로를 공격해 [[한중]]을 정벌한 소식과, 마침 합비 방면 장강 북쪽 군과 현의 백성을 내지로 이주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 참에 눈엣가시던 [[합비]]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10만의 군사를 동원했다. 한편 조조는 213년 유수구에서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온 뒤, 장료를 보내 [[악진]], [[이전]] 등과 함께 7천 여 명을 이끌고 합비에 주둔케 했다. 10만의 오나라 병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병력이였다. 조조가 [[장로(삼국지)|장로]]를 정벌할 때 호군 [[설제]]에 교서를 주었는데 서신의 겉봉에는 적이 도착하면 뜯어보라고 적혀 있었다. 갑작스럽게 손권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합비를 포위하자 함께 뜯어보았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만약 손권이 오면 장료, 이전 장군은 출전하고 악진 장군은 수비하고 호군(설제)은 싸움에 참여하지 마시오. 제장들이 모두 의심스러워 하자 장료가 말했다. >공께서는 원정하느라 바깥에 계시므로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린다면 적군이 우리를 깨뜨릴 것이 분명하오. 이 교서의 뜻은, 적이 미처 집결하기 전에 요격해 그들의 예기를 꺾어 군심을 안정시켜야 지켜 낼 수 있다는 것이오. 용맹한 장료와 이전은 먼저 선봉을 꺾고 신중한 악진이 방비를 튼튼히 하는것에 이전 또한 장료와 의견이 같았다. 이전전에 따르면 [[악진]], [[이전(삼국지)|이전]], 장료는 평소에 서로를 싫어했는데[* 흔히 이전의 숙부 이건을 장료가 죽여서 이전이 그를 싫어했고 악진은 둘 사이에 덤터기로 낀 처지로 나오나 이는 후대의 창작이다. 정사상으로 이건은 장료가 아닌 설란과 이봉의 통수로 죽었고 이전이 장료를 싫어했던건 과거 여포의 동맹이었던 그와 한솥밥을 먹어야하는 처지가 된 걸 못마땅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악진의 경우도 본래 악진은 조조와 함께 초창기부터 활약한 거병동기인데 자신이 직접 격퇴시킨 전적도 있는 장수를 상관으로 모셔야하고 주변 분위기도 장료를 떠받드는 걸 아니꼽게 여겨서 싫어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료는 이 상황에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개하였다. >성패의 기회는 이 한 판의 전투에 달렸소. 여러분들이 만약 의심한다면 나 장료 혼자서 군대를 거느리고 결판을 낼 것이오! 그러자 정신을 차린 이전도 맘을 달리 먹었다.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 당신의 계책이 옳은지 틀린지를 볼 뿐이지, 내가 어떻게 사사로운 원한으로 공의를 돌아보지 않겠소! 청컨대 그대를 따라서 나갈 것이외다.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접은 이전을 보고 악진도 진심으로 뜻을 동참하기로 선언했다. 이에 장료는 밤중에 용맹히 뒤따를 군사들 8백 명을 뽑고 소를 잡아 장사(將士)들에게 먹였다. 그 다음날 큰 전투가 있었다. 새벽 녘 동틀 무렵, 장료는 갑옷을 입고 극을 들고 선두에 서서 적진을 함몰시켰다. 수십 명을 죽이고 2명의 장수를 베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보루를 뚫고 들어가 손권의 대장기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손권은 크게 놀랐고 주위의 사람들은 당황해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손권은 달아나 높은 무덤 위로 올라갔고 장극(長戟)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장료가 손권을 욕하며 내려와 싸우자고 했으나 손권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장료가 이끄는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사들을 모아 장료를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장료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 급히 공격해 포위를 뚫었다. 휘하의 수십 명을 이끌고 포위를 벗어나자 뒤에 남은 군사들이 외쳤다. >장군은 우리를 버리십니까! 장료는 다시 포위망 안으로 돌입해 남은 군사들을 구했다. 손권의 병사와 말들은 모두 초목이 바람에 휩쓸리듯 무너져 내려 그를 대적할 자가 없었다. 새벽부터 낮까지 계속된 싸움으로 오인(吳人)들의 예기를 꺾었고 합비로 돌아가 수비를 강화하자 군심이 안정되고 제장들은 모두 탄복했다. 손권은 합비를 10여 일 간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장료는 제군을 이끌고 이를 추격해 또 다시 손권을 거의 사로잡을 뻔 하기도 했다. 감녕전에 따르면 군대는 모두 물러났고, 오직 수레 아래의 호사(虎士) 1천여 명과 [[여몽]], [[장흠]], [[능통]] 및 [[감녕]]이 손권을 따라 소요진 북쪽에 있었다. 장료는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관찰하고 즉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였다. [[감녕]]은 적에게 화살을 쏘았으며, [[능통]] 등도 필사적으로 싸웠다.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 때문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 질렀다. 그는 웅장하고 강인했다. 반장전에 따르면 합비 싸움에서 장료가 급습했을 때, 장수들은 무방비 상태였고, [[진무(삼국지)|진무]]는 분투하다 죽었으며, [[송겸]]이나 [[서성]]은 모두 후퇴하였다. [[반장(삼국지)|반장]]은 후방에 있었지만, 곧바로 급히 달려가서 말을 비껴 송겸과 서성의 병사들 중 달아나는 두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돌아와서 싸웠다. 하제전에 따르면 당시 성 안에서 나온 적병과 전쟁하는 중에 [[서성]]이 부상을 입어 창을 잃게 되자, [[하제]]가 병사를 이끌고 대항하여 서성이 잃었던 것을 찾았다. 능통전에 따르면 손권이 선두의 병력의 뒤쫓아 가 되돌리려 했으나, 병력이 이미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사세가 서로 미치지 못하였는데, 능통이 친근히 대우하던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포위를 무너뜨리며 손권을 붙잡고 지켜 내며 탈출하였다. 적들이 이미 다리를 무너뜨렸지만, 다리에 속한 양쪽 판은 그대로 있으니, 손권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갔고, 능통은 다시 돌아서 싸우니, 주위 병사들은 거의 다 죽었고 자신 또한 상처를 입었지만, 수십 인을 죽였다. 오주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이 진교(津橋)에서 준마에 탄 채 있었는데, 진교 남쪽은 이미 철거되어 한 길 남짓 널빤지가 없었다. [[곡리]]가 말 뒤에 있다가 손권에게 안장을 꼭 잡고 고삐를 늦춰 잡게 한 다음, 채찍으로 말이 뛰는 것을 도와 드디어 진교를 건너뛰게 했다. 하제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하제는 이대 병사 3천 명을 인솔하여 소요진 남쪽에서 손권을 맞이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오나라 장수들의 용맹함이 드러나지만, '''실제로는 중앙에서 군대를 통솔하고 지휘해야할 최고위 장수진들이 모두 일개 병사처럼 직접 무기를 쥐고 처절하게 싸울정도로 상황이 긴박했다는 것이다.''' 능통전에 따르면 능통은 손권이 이제는 화를 면했을 거라 생각하여 이내 돌아왔다. 다리는 무너지고 길은 끊겨 능통은 갑옷을 입은 채로 자맥질하며 왔다. 손권이 이미 배에 올랐는데, 그를 보고 놀라 기뻐했다. 하지만 능통은 친근히 대우하던 병사들 중 돌아온 자가 없는 것을 보고 애통해했다. 오주전 주석 헌제춘추에 따르면 장료가 항복한 오나라 장수들에게 물었다. >아까 보니깐 자줏빛 수염을 가진 장군이 있었어.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짧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던데, 그게 누구요? 항복한 장수가 말했다. >[[얼척|'''그것은 손회계(손권)입니다.''']] 당황한 장료와 악진은 서로 쳐다보다가 말할 새도 없이 뛰쳐나가 다시 추격했지만 결국 이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부분 때문에 장료에게 안면인식장애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장료가 만나본 적도 없는 손권의 얼굴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을 테고, 설마 군의 지휘관이 퇴각하는 군대 후위에 남아서 직접 추격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겠냐고 여겼을 것이다.] 여하튼 [[조조]]는 장료를 매우 장하게 여기고 정동장군에 임명했다. [[당나라]] 시대의 아동용 교재 몽구(蒙求)에 따르면 장료의 무용은 강동에도 널리 퍼졌으며, 강동에선 거의 [[망태기 할아버지]] 취급을 받았는지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다가도 '''[[료라이라이|료래료래(遼來遼來)]]라 말하면 반드시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장료를 합비성 방어 총책임자로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건안 11년(206년)에 조조가 천자에게 표문을 올린것을 보면 '조조가 악진, 우금, 장료를 칭찬했다. 우금을 호위장군, 악진을 절충장군, 장료를 탕구장군으로 승진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셋 다 잡호장군으로 동렬인데 단, 조조가 표문에 이름을 적은 순서대로 조조 진영 내부에선 확실하게 서열이 갈린다. 우금은 오자양장 장악우장서 중 가장 먼저 사방장군 중 하나인 좌장군으로 승진했고 7군 수몰 사건이 있기 전까진 조조의 직통 라인에선 조씨와 하후씨 그리고 [[조엄]]을 비롯한 극소수의 장군을 제외하곤 '''부동의 서열 1위였다.''' [[장패]]와 [[손관]]이 우금보다 관직과 서열이 높긴 했는데 이들은 이 전후 시점에선 조조의 부하가 아니라 휘하 군벌이라 조조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다. 같은 잡호장군이라도 장료는 우금에게 비벼볼 위치가 아니었다. 관건은 악진인데 악진이 장료보다 서열에선 앞서긴 하는데 우금 정도의 차이는 아니다. 정리하면 [[우금]]이 넘사벽이고 악진, 장료, 이전 순이 된다. 장료가 이전보단 약간 끗발이 있었고 악진에겐 좀 밀렸다. 215년 합비 전투가 벌어졌을 때 굳이 책임자를 하나 찝으라면 조조가 서열을 좀 더 높게 봐준 악진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근데 실제 상황은 장료가 주도권을 쥐고 이전을 부장으로 삼는 형태로 손권을 대파했다. 장료는 관직은 동렬이지만 자신보다 군부 내 서열이 높은 악진을 자신의 초인적인 무력으로 오히려 아래로 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각종 기록에서 보이는 조조군 내부 서열은 분명 악진이 위이다. 악진을 필두로 3명의 장수가 공동지휘하는 체계였다. 조조가 기대한 건 훈령에서 보이는 대로 악진의 견고한 방어, 장료의 날카로운 공격, 이전의 적절한 지원이라는 완벽한 삼박자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상황을 주도한 건 장료였다.[* 즉, 악진은 성에서 수성을 하고 장료는 외부에서 진을 쳐 상대를 받아들이며 이전은 그 사이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각군을 지원하는 형세. 상대가 합비성을 공격하면 장료가 상대의 옆구리를 치고 상대가 장료를 치면 이전이 구원하는 그림으로 망치와 모루 전술의 일종이나 장료는 이를 이전과 함께 나가 싸우는 것으로 해석했고, 소수의 군사로 손권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것도 궤멸적으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