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로회신학대학교 (문단 편집) === 해방 후 역사 === 광복이 되어 장로교 내 각 파벌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신학교 분열이 표면화되었다. 특히 조선신학과 신학적인면과 파벌적인면 모두에서 반대되던 (후)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위치하여[* 평안도세력과 경기중부세력간의 세력, 파벌문제가 낳은 병크다. 평안도의 평양신학교에 경쟁의 의미로 경기의 조선신학교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남북분단의 와중에 사라지고 장로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라고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하게 존재하게 되면서[* 1946년 6월 12일 남한지역 장로교회 노회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남부총회로 모여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조선신학교를 직영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얼마간 장로교의 인정을 받은 정식 목회자 양성기관은 조선신학교 뿐이었다.] 목회자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신학적(교리적)/헤게모니적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심지어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하던 옥중성도들을 스스로 내치는 바람에 이들이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예장고신]]으로 독립하고 [[고신대학교|고려신학교]]를 설립하여 광복한 지 몇 해 되지도 않아 명분을 상당수 잃은 상태였다. 이러한 장로교 내부 교파 간 갈등은 더욱 커져 결국 1947년 (후)평양신학교 출신 학생 51명이 대구에서 열린 제 33회 총회에 서울에 새로이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김재준은 그해 7월에 총회에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히 밝혔지만 1948년에 총회의 요청을 받은 박형룡 목사가 이를 검토한 결과에 대해 장로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며 매우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박형룡은 보고서에서 김재준의 주장이 교회를 능욕하는 내용이라고 비판했고, 이게 장로교 총회가 조선신학교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었다.] 박형룡의 의견을 받아들인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위해 김재준을 1년간 해외로 유학보내고 조선신학교에 보수주의(근본주의) 교수들을 대거 수혈하는 방안을 내놓지만 이 방안에 대해 조선신학교에서 거세게 반발함으로써 사실상 이 개조안은 무효화된다. 때문에 결국 총회 산하 신학대책위원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포기하는 대신 그해(1948년) 5월에 보수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를 새로이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에 따라 결국 그해 6월, 박형룡를 임시교장으로하여 __서울 남산에 새로이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했고, 이것이 1949년 35회 총회에서 인가 받게되면서 장로교 내부 분열이 가시화된다.__ 한편 이 난리 중에도 1947년에는 문교부로부터 정규대학으로 인가받는다. 그리고 재단법인 한신학원 인가와 함께 조선신학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이 난리를 피우는 도중에 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신학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교육을 계속한다. 1951년에 36회 총회에서 서로 교육하는 신학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신학교의 양립에 의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두 신학교의 직영을 전부 취소하고 대신 총회직영의 새로운 신학교를 대구에 세우자며, 사실상 두 학교를 합친 새로운 학교를 만들자는 방안을 내놓고 그 해 9월에 [[총신대학교]]가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과 교수진이 남산에 있던 장로회신학교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고, 총회에서 내놓은 두 학교 결합을 위한 소위 '합동 7원칙'에서 요구한 "신한 교육을 순복음부의에 기초해서"한다던가 중요과목을 7인의 선교사 교수에게 맡긴다던가, 신학교 현직원의 총사퇴 등등의 안은 조선신학대학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므로, 조선신학대학 측에서는 당연히 불복했다.[* 명분은 총회 진행방식 및 새로운 신학교 설립의 불법성] 이때 학교 이름도 현재 [[한신대학교]]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는 한국신학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갈아버린다.[* 1951년 4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다.] [* 글에 따라 이미 총회신학교가 세워진 후인 1952년에 교명을 바꿨다고 설명하는 곳도 있으나 한신대학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연혁에는 1951년의 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이후로는 각 대학은 서로 독립된 상태였으며, 1953년에 결국 [[한신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리되었다. 1953년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대구광역시]]에서 시작하여 후에 서울로 옮겨오게 되었다. 서울로 옮겨온 총회신학교는 남산의 옛날 조선 신궁 자리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이 자리가 적산이었으므로,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아, 교사를 짓자고 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돈 3,000천만 환을 사기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지지하는 측과 이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 분쟁을 계속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 싸움으로 결국 1959년 대전에서 모인 제44차 총회에서 총회신학교가 두 파로 나뉘어, 에큐메니칼 측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 353번지 1만 9천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짓고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였고 N.A.E 측, 즉 교회일치운동을 반대하는 측은 사당동에 교사를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총회신학교'[* 지금의 [[총신대학교]]이다.] 출발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1961년 문교부로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으며, 1966년 대학원 설립, 1973년에는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개명하고, 1976년부터 [[미국]] San Francisco 신학교와 목회학 박사과정을 공동으로 개설하였다. 1980년에는 신학대학원(M.Div.)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92년에는 지금까지 San Francisco 신학교와 공동으로 실시하던 목회학 박사과정을 중지하고, 1992년에 [[시카고]]에 있는 McCormick 신학교와 공동으로 이 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1993년부터는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3년에는 [[대한민국 교육부|교육부]]로부터 '세계선교대학원'이, 1995년 10월에는 교육부로부터 '교역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이, 1996년 11월에는 '교회음악대학원'이, 2001년 7월에는 '교역대학원'을 폐지하고, '목회전문대학원(목회신학석사과정, 목회학박사과정)'이 설립인가를 받았다. 현재로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미지는 '[[숭실대학교]] 신학대학'이다.[* 총신대도 마찬가지로 일반 대중들에게는 같은 예장 합동 소속인 중부대학교와 엮인다. 다만 총신대가 중부대보다 인지도가 높은 경우라서 중부대가 '총신대 종합대학'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실제로 숭실대가 학부 과정에 기독교학과를 개설했지만 신학대학원을 개설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장로회신학대학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사가 되려는 숭대생들이 흔히들 장신대 신대원으로 진학하다보니 이런 인식이 굳어졌다. 다만 숭실대와는 교단만 같고 법인이 분리되어 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어서 목사를 지망하는 신입생도 꾸준히 줄어들자 장신대를 중심으로 전국의 예장 통합 계열 신학대학을 모두 통폐합할 것이라는 예측도 심심찮게 나온다. 하지만 각 노회 별로 신학대학을 갖고 있는 형태라서 법인이 분리되어 있고, 각 신학대학 소재지의 지역 사회가 통폐합에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조속한 통폐합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존속은 어려울 것이며 수도권 기준으로 [[한신대학교]], [[감신대학교]], [[총신대학교]] 정도가 역사성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있으나, 2023학년도 신학대학원 입시 결과(주요 교단 신대원 중 유일한 신입생 100% 충원)나 교단의 규모(교인 수 1 위), 학교의 인지도 등의 여러 지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위의 의견과 같은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