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례식 (문단 편집) === 한국 === [[파일:external/c.hani.co.kr/19735ebc6274b76f3761f7c25d06ddcc.gif]] [youtube(ekNG4WrDTIQ)]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한일월드컵]] 때는 한국 팀이 골을 넣자, 장례고 뭐고 [[장례식장]]에서 [[상주(장례)|상주]]를 포함한 전원이 춤추고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난리법석이 TV 뉴스를 타기도 했다.[* 당시 경기는 예선 3라운드 포르투갈전] 전국민이 흥분의 도가니로 둘러싸인 월드컵 분위기가 장례식의 침울함마저도 이겨버린 인상깊은 영상으로 아직까지도 회자된다. 어느 외국인 기자가 [[대한민국]]의 장례식장을 직접 가 보고 [[축제가 아니라 장례식입니다|'''"축제 같은 느낌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술자리를 벌려서 [[육개장]], [[수육]], 모듬전, [[소주]], 막걸리 등을 먹고 마시며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한쪽에서는 '''[[화투]]'''를 치고 있고[* 단적인 예로, 장례식에서 [[섰다]]를 하면 10과 4의 "장사"를 제일 높은 족보 "38광땡"보다 패를 더 높게 쳐주는 [[불문율]]이 있다. 상주에게 돈을 빌리면 끗발이 좋다는 속설도 있고, 또한 깊은 시름에 빠진 상주에게 위로차 말이라도 한 번 더 붙일 겸 "상주님 돈 좀 빌려주세요"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웬만하면 상주도 이 날만큼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흔쾌히 빌려준다. 물론 빌리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 정중하게 말하자.] 밖에서는 [[윷놀이]]를 하고 있고,[*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장례식장]]에서 의례를 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고 손님을 맞이하고 [[발인]]까지 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면서 [[상가|상갓집]] 안에서는 화투놀이를, 바깥 마당에서는 윷놀이판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서로 '''싸우고''', '''웃고''', 울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187520&memberNo=40848952|링크]]. 아무래도 오랜만에 일가친척이 한데 모였으니 반쯤은 명절 분위기이다. 이를 일종의 [[카타르시스]], 즉 슬픔이라는 감정을 다른 형태로 승화시켜 배설하는 형식으로 보기도 한다. 가시는 길 안녕히, 홀가분하게 돌아가시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런 풍경도 고인이 충분히 연로한 상태에서 노환으로 타계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말로 고인을 떠나보내야 하는[* 고인의 육신을 정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발인 등의 과정일 때는 그때만큼은 그렇게 신나게 놀던 사람들도 울음을 터뜨리며 여느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침울한 분위기가 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GLEPqCXx-ZA|장례식 에피소드]]를 통해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실제 당시 [[상가|상갓집]]의 분위기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영화 [[학생부군신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한국 특유의 장례 분위기를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 <축제(祝祭)>가 있다(임권택 감독의 동명의 영화의 원작). 실제 [[진도군]]에서는 '다시래기'라 하여 출상 전날 밤에 춤추고 노래하면서 논다. 일종의 재담극.[* 중요 무형문화제 제81호.] 뿐만 아니라 출상 때에도 [[https://youtu.be/RDIO2RzWA-c?t=3576|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상여]]를 따라간다. [[북(악기)|북]]과 [[꽹과리]] 등 악기 필수. 이때 상여를 매고 가면서 부르는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상여소리가 유명하다.[* 영화 [[축제(영화)|축제]]를 보면 이 때 상여소리를 하는 상두를 시키기 위해 그 동네의 유명한 소리꾼을 데려와서 상여소리를 요청하는 게 있다. 문제는 소리꾼이 그 날 술을 과하게 해서 누워버리는 바람에 결국 마을에서 노래 잘 부르는 아저씨가 땜빵을 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관련 다큐멘터리도 있는데 이에 대해 상당히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러한 형태는 과거에서부터 이어졌는데, 그 근거로 [[하멜 표류기]]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한술 더 떠서 풍악까지 곁들여서 [[상주(장례)|상주]]는 곡을 하지만 조문객들은 즐겁게 즐긴다는 모습도 서술되어 있을 정도이다. 다만 [[http://repository.kihasa.re.kr/bitstream/201002/692/1/95-04.pdf|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집이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거의 모든 걸 해결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옆에 모르는 가족도 장례식을 하고 있어 고성방가를 자제하게 되고, 음주 단속과 도박 단속을 강력하게 하면서 장례식장에서 음주와 노름도 자제하는 형태로 바뀌었으며, 대다수가 도시에서 살고 자가용을 끌면서 상주와 밤을 새워줄 필요도 없어져서 이러한 문화는 많이 사라진 상태다.[* 1980년대 말 [[시민아파트]]까지는 공동 주택임에도 옛날식으로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많았다. 아파트 복도, 공터, 놀이터까지 활용하였고 망자가 살던 동 주민은 물론 인근 동의 지인들까지 문상을 갔다.] 사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장례식장의 분위기의 밝은 정도는 고인의 사망 당시의 나이에 비례'''한다. 즉, 고인이 [[장수|고령일수록]] 밝고 [[요절|젊을수록]] 어둡다. 사망자가 나이가 많아서 [[노환]] 등 [[자연사]]로 잠을 자듯이 편히 가면 [[호상]](好喪)[* 장의를 관리하는 이른바 장의사를 뜻하는 말도 호상(護喪)인데, 한자만 봐도 다르니 사용시 주의를 요구한다. [[병사]](病死)여도 [[치매]] 같은 비참한 병이 아닌 이상 고령으로 병상에 누워 지병으로 사망했으면 [[호상]](好喪)으로 친다. 현대에는 보통 90세가 넘어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면 호상으로 보는 분위기. 다만 호상이더라도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고인에게 삼베옷을 입히고 장례를 치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이라 하여 식장 분위기도 그리 어둡지 않고 오히려 “그래도 당신께서는 오랫동안 잘 살다 편히 가셨다.” 라며 동네 지인 및 동년배들이 분위기를 좀 띄워주신다. [[조선시대]]에도 장례 후에 장구 치고 북 치면서 축제를 벌이는 풍습이 있었으며, 아예 중국의 주자가례에서 언급된 엄숙주의적인 유교식 장례를 지배층이 제대로 도입하는 것조차 실패한, '''한국 유교 전래 이전의 풍습이 남은''' 나름 유서 깊은 문화다. 600년대에 편찬된 [[수서]]에서 [[고구려]]에서는 “처음 상을 당했을 때는 곡을 하고 울지만, 장사를 지낼 때는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며 장례를 치른다.”라는 언급이 있을 정도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05_0070_0040|#]] 만약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친척이나 지인의 장례식에 가게 되면, 유족을 신경쓰며 일부러 슬퍼하는 기색을 보일 필요는 없다. 사실 노환으로 죽은 사람의 장례식 풍경이 의외로 가벼워지는 것은 서양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장례식에서는 일가 친척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이 참석하므로 가족끼리 오랜만에 만나기도 하고 수 십년만에 친구를 만나기도 하니[* 예를 들어, 50넘은 사람이 고등학교 동창을 30년 넘어서 재회하는 상황이 많이 일어난다.] 의외로 분위기가 가벼워진다. 이러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지, 지인, 옛 이웃, 친구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추억을 나누면서 울고 웃다 산 사람들간의 관계도 재확인하고, 감정적인 해소도 되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적어도 노환으로 자연사한 사람의 장례식은 은근히 축제 분위기를 띄는 건 충분한 사회학적 근거가 있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장례식장]]에 가서 유족들에게 '''"[[패드립|호상이시네요.]]"'''라는 말을 하는 무례함은 범하지 말자. 아무리 호상이라고 해도 생판 남이 그런 소리 하면 문상 온 일가친척들은 충격받기 좋고 그 자리에서 상주 및 상주 가족들한테 얻어터지기만 할테니 알아서 사리자. 반면 [[요절|젊은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거나]], 고인이 [[자살]]한 경우, 대형 사고로 줄초상이라도 나면 자연히 식장 분위기는 엄청나게 침울해진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참사]] 때 단원고 학생들의 장례를 도왔던 장례식장 대표가 그 말할 수 없이 참담한 분위기에 충격을 받아, 자신의 수익을 전부 털어서 유가족 지원과 단원고 기부에 쏟아부었던 일이 있다. 이때의 일을 계기로 계속 단원고 학생들의 교복을 사 주는 등의 기부를 이어가고 있다고.] 드물게 살다가 주변에 젊은 지인이 요절, 특히 자살 등으로 고인이 되었을때 당장 사랑하는 가족인 상주들 심정이야 말할것도 없지만 조문객들도 뭐 위로의 말도 찾기도 힘들고, 오랜만에 못본 사람 만나서 인사할 분위기도 아니고 정말 그자리에 있는거 자체가 모두에게 괴로운 장례식이 된다. 설령 고인이 고령이라 해도 사고를 당했거나 흉악범죄 피해자이거나 실종 후 시신으로 발견되는 등의 참혹한 죽음을 맞았으면 분위기가 어둡다. 이럴 땐 분위기 봐서 눈치껏 행동하는 게 좋다. 다만 젊은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서 죽었다면 분위기가 어둡지 않은 편이며, [[살신성인]]하여 수많은 목숨을 구하고 자신은 죽음을 당했다던지 하면 유가족들이 의로운 행동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침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호상]]이라고 할 수도 없으므로 이럴 때도 행동에 있어 조심하는 것이 낫다. 아무리 분위기가 호상에 준한다고 해도 [[의사자]] 선정 등 여러 복잡한 절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아~청년이 사망하기라도 하면 그 분위기는 정말 참담해진다.[[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8842894|댓글 참조]] '''목놓아 울다가 [[탈진|지쳐서]] 멍하니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뭔가 위로를 하고 싶어도 이만큼 충격적인 일을 겪은 사람들이 얼마 없어, 말을 꺼내는거 자체가 무안해져 자연스럽게 슬픔만 짙게 깔린 어색한 침묵이 형성되니 정말로 문상 가는거 자체가 모두에게 비극인 경험. 게다가 고령일수록 조문객들이 고인에게만 인연이 있거나, 반대로 고인과는 일면식도 없이 고인의 자녀 등과 관계가 있어 조문하는 경우가 대다수가 되지만, 나이대가 어릴수록 고인보다는 가족들 전체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는 경우가 많다보니 더욱 그렇다. 특히 젊은 사람이 범죄자에게 살해당하거나 자살, 불의의 사고 같은 누가봐도 비극적인 경우로 장례식이 열렸을 경우 모이는 사람 태반이 서로 다 아는 동네, 학교 친구이고 평소에는 같이 모이면 떠들썩하게 즐거운 분위기였을 사람들이 눈물도 다 빠질만큼 울다 탈진한 [[유족]]들 두고 우울하고 어색하게 있는건 정말 가는 사람도 트라우마 걸릴만한 괴로운 일이다. 장례식에서 댄스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연히 뉴스에 보도된 이후 욕을 얻어먹었다. 만수무강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의 호상이라면 백번 이해가 간다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으나, 해당 영상에서 언급된 장례식은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악상이었고, 고인의 유언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https://youtu.be/zAjjzj40OXk|#]] [[장례식장]]마다 한편에 큰 방이 있고 거기서 식사를 대접하는데, 문상을 오는 사람들이 들러서 밥을 얻어먹는다. 물론 부의금을 내지만 비용은 상주 측에서 부담하는 데다, 더 달라면 쿨하게 더 주는 업체들이 대부분. 음식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대개의 경우 [[육개장]]과 [[편육]], [[수육]]은 사실상 필수로 들어간다.[* 편육은 업체측에서 제공하는 가장 싼 메뉴에 속한다는 점도 있긴 하다.] 여기에 더해 김치, 소고기, 새우젓, 전이나 부침 및 [[산적(요리)|산적]], 떡, 가자미무침, [[사이다]], [[식혜]], 마른안주, 코다리조림, 과일 정도가 더 붙는다. [[https://www.kyobostory.co.kr/contents.do?seq=1374|기사]], [[https://www.insight.co.kr/news/308335|기사 2]]. 도시의 중산층 가정, 농어촌 마을 이장댁에서 장례를 치르면 식비만 백만 원이 넘게 들어가는데,[*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충실히 했다면 부의금이 식비를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닌 경우가 많다. 사실 대부분이 해당되는데, 약간 대충 했다 해도 조문객 수는 적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98%는 감당이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초 요청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고 가면 계속해서 영수증이 추가된다.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14/2019101401270.html|기사]]. 그리고 이 때마다 상주로부터 서명도 받아간다. 장례가 끝나면 청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빈소]]를 지키던 [[상주(장례)|상주]]도 시간이 지나면 조문객들과 이야기 할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상주 직계 친척들이 빈소에서 대기하고, 상주는 식탁에서 문상객과 함께 [[소주]], 막걸리를 주거니받거니 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조문객도 고인의 생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니 늦게 문상을 왔는데 상주를 봐야 한다면 식당 쪽을 살펴보자. 다만 그마저도 21세기 이후에는 자차 보급이 늘어나면서 이전 같으면 날밤을 새야할 정도의 장거리 문상도 하루 당일에 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조문객 1명당 조문 시간 자체가 이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음주도 줄어들었다. 음주운전 단속도 갈수록 엄격해지기도 하고.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율이 높은 [[일본]] 같은 경우 70대인 고인의 자녀가 [[상주(장례)|상주]]를 맡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고령화가 더욱 진행되면서 한국 등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추세. 옛날이었으면 자신의 장례식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니 이들은 체력적으로 부담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게다가 70대 자녀의 자녀가 되는 고인의 손자 역시 50을 바라보는 경우가 대다수라 체력이 팔팔하지는 않아서 장례식이 진행될수록 피로가 누적된 [[유족]]들이 "이러다가 줄초상 나겠다."라는 말을 내뱉기도 할 정도다. 또한 자식들도 50, 60을 바라보면서 부모가 일찍 결혼하여 자녀가 일찍 태어난 뒤 이들이 90살, 100살 넘게 살 경우 자식은 60, 70살이 넘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예전에는 가장 큰 불효로 여겨졌던 일인 [[참척#s-1|자식이 먼저 죽는 일]]도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8년에 별세한 [[구본무]] [[LG그룹]] 회장(향년 73세)이 있다. 그의 부친 [[구자경(기업인)|구자경]] 명예회장은 아들보다 더 나중인 [[2019년]]에 94세로 작고했다. 사실 구본무 회장도 친아들을 먼저 보낸 적이 있었는데, 조카 [[구광모]] 현임 회장을 양자로 입적시키기 전까지는 그가 유일한 아들이었고, 후사도 없이 20대에 요절했었기 때문에 대를 이을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과거에는 지금보다도 심각한 불효로 여겨졌었다.] 이에 21세기 들어서는 [[빈소]]를 안 차리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고 좌식 생활이 좋지 않다는 인식과 맞물려 기존의 좌식 빈소를 입식 빈소로 바꾸는 경우도 늘고 있다. [[대구파티마병원]]이 지역 최초로 입식 빈소로 새단장하였다. 서울의 경우도 신촌 세브란스병원이나 중앙대 병원의 장례식장이 입식이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1131438027422|기사]] 장례식에 갔다오면 집 안에 들어오기 전에 몸에 [[소금]]을 뿌려주는 것이나 소금을 사오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부정을 정화하고 잡귀를 쫓아낸다는 믿음에서 유래되었다. 혹은 조문 후 장삿집(음식점이나 구멍가게 등도 포함)을 반드시 찍고 집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같은 이유로 장례식장에 조문 갔던 사람은 당일에 결혼식장, 돌잔치 같은 경사에는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둘 다 가야만 한다면 경사를 조사보다 먼저 가면 된다.] 상주 등 직계 가족의 경우 탈상 이전에는 경사에는 안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