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도영 (문단 편집) === [[5.16 군사정변]]과 그 이후 ===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출범 이후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후임인 [[김종오]] [[중장]]이 육군참모총장 임기 중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육군참모총장은 대장이 부임하게 된다. 마지막 중장 육군참모총장인 셈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앞두고 장면은 장도영에게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다고 하였으나 장도영은 장면에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김종필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가 장도영을 포섭하고자 직접 [[혁명]] 계획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진압하는 것도 아니고 적극 가담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보여[* [[중앙일보]] 2015. 4. 6 김종필 소이부답 기사 '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4월 10일에도 그는 박정희 소장을 통해 내가 작성한 혁명 계획서를 전달받았지만 끝내 반환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정변 세력의 편을 들어준 줄 알았더니 갑작스럽게 5·16 새벽이 되자 [[한강]] 다리를 건너던 혁명군에 발포를 명령하더니 갑작스럽게 오후에는 혁명 지지 쪽으로 돌아서는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등.]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http://www.whoim.kr/print_paper.php?number=4810&news_article=news_article|당시 군사정변에 가담했던 장교의 평가]] 본인은 훗날 자신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이에 대해 극구 부인했는데 방첩대장 [[이철희(군인)|이철희]][* [[장영자]]의 남편.]가 계속해서 박정희 쪽은 아니며 오히려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세력에서 쿠데타 위협이 있다는 역정보를 보고해서 상황 판단을 잘못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장도영의 주장은 [[윤보선]] [[대통령]]이 "[[계엄령]]은 법적 절차를 따라야 하며 아군끼리 피를 흘리지 말라!"라고 하여 쿠데타 세력이 주장한 계엄령을 합법적이 되도록 지원하고 무력 진압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이에 따랐다는 것이다. 아군끼리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돌아가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만 외치다가 결국 사태 수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쿠데타 세력의 [[얼굴마담]]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이다. [[주한미군]]과 [[이한림]] 제1야전군사령관은 쿠데타 진압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헌법상 국군통수권을 가진 대통령 윤보선은 유혈진압을 거부한 상황이었고 정부 실권을 가진 국무총리 장면은 도망가서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할 게 없었다는 것이고, [[서울]]로 밀고 들어온 [[대한민국 해병대]]는 [[대한민국 해군]] 소속이고 [[제6군단]] 포병대는 주한미군 소속이었기에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고, 장도영의 지시에 따르는 병력은 [[헌병대]] 일부와 30사단 내 1개 중대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쿠데타가 발생하고 육군본부까지 장악된 이후 수습 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음을 피력한 것이고, 5.16 이전에 쿠데타 계획이 여러 차례 누설되고 박정희가 그 세력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음에도 박정희에 대해 즉각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고, 5.16 당시 쿠데타 시도가 파악되었음에도 쿠데타 세력이 모인 6관구 사령부에 헌병 병력을 보내 해산을 종용할 뿐 적극적인 진압 및 체포를 명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장도영이 과연 쿠데타를 막을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을 수 밖에 없다. 5.16 이전에도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수차례 보고하고 5.16 당시 30사단에서 쿠데타 계획이 적발되자 곧바로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 시도임을 파악하고 보고하였던 서울지구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은 장도영이 처음부터 쿠데타에 가담한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 장도영은 박정희 세력에 의해 포섭되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되었으나, 한달 반 만인 1961년 7월 2일 반혁명 혐의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에 의해 전격 체포되면서 [[숙청]]되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7520151|#]] [[https://archives.kdemo.or.kr/photo-archives/view/00755471|공판 사진]] 1962년 3월 10일 [[http://www.law.go.kr/법령/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00633,19610622)|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상 반혁명 행위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으나 1962년 5월 2일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고 바로 [[미국]]으로 떠난다. 1968년에 잠시 귀국하여 박정희와 만났다고 전해진다. [[http://ilyo.co.kr/?ac=print&entry_id=386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