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덩쉬안 (문단 편집) === [[2차 직봉전쟁]] ~ [[손봉전쟁]] === 1924년 [[2차 직봉전쟁]]에 1군단장으로 참가하여 3군단 사령관 장쉐량과 함께 1,3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때 관내진출에 반대하던 궈쑹링과 불화를 빚었다. 장덩쉬안 휘하의 2여단 포병단장 진침이 부대장 염종주가 작전에 힘쓰지 않다고 보고하자 장덩쉬안은 염종주를 해임했는데 염종주는 궈쑹링에게 달려가 호소했다. 궈쑹링은 즉각 1군단 소속이었던 진침을 자신의 부대로 배속시킨 후 진침을 단장에서 해임한 후 염종주를 복직시켜 장덩쉬안을 분노하게 했다. 10월 22일의 구문구 기습을 두고 장덩쉬안과 궈쑹링은 크게 언쟁했다. 궈쑹링은 즉각 구문구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고 장덩쉬안은 이미 큰 전과를 올렸는데 병력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사관파와 사이가 좋지 않던 육대파의 수장인 궈쑹링은 [[장쉐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덩쉬안과 한린춘 등 사관파 인물들을 마구 비난한 다음에 회의장에서 나가버렸다. 이에 장덩쉬안은 궈쑹링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고 장쭤린에게 보고했다. 화가 난 궈쑹링은 병력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이 때문에 사하채 전투에서 봉군은 전선이 붕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 장덩쉬안은 경극 배우의 말투를 흉내내며 궈쑹링을 조롱하곤 하여 더욱 궈쑹링의 원한을 샀다. 2차 직봉전쟁은 봉천군벌의 승리로 끝나고 장쭤린은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으로 추대했으나 봉군 내부의 불화는 여전했다. 장쭤린은 장덩쉬안에게 강소성을, 궈쑹링에게 안휘성을 주려고 했는데 양위팅이 강소성을 요구하였다. 이에 장쭤린은 양위팅을 강소독판에 임명하고 장덩쉬안을 안휘독판에 임명하고 상장으로 승진시켰는데 이 때문에 안휘성 접수 준비를 하던 궈쑹링은 닭 쫓던 개꼴이 되고 말아 크게 분노했다. 장덩쉬안은 궈쑹링이 임명한 참모장 팽진국을 해임했다. 이후에도 장덩쉬안은 강남의 지배자 자리를 노려 장쭤린에게 양위팅 대신에 자신에게 강남의 관리를 맡겨달라고 참소하곤 했다. >"강남의 정세는 매우 복잡합니다. [[양위팅|'작은 제갈량']]은 융통성이 부족하고 콧대가 너무 세어 강남의 국면을 대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강남을 저에게 맡기면 '작은 제갈량'보다 훨씬 유리할 것입니다." 이후 [[5.30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상하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대를 파견했으며 10월에 직예군벌의 [[쑨촨팡]]이 5성연군 사령관에 취임, [[손봉전쟁]]을 일으켜 봉천군벌에 대한 역습을 가하자 양위팅과 장덩쉬안 모두 패하여 달아나게 되었다. 쑨촨팡은 산동성경에 이르러 강소성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진격을 멈추었고 장덩쉬안은 1927년 11월 7일 덕주에서 제4방면군 군단장에 임명되어 휘하에 집익교, 진침을 여단장으로 임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