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덕수 (문단 편집) == 생애 ==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의 빈농가에서 장붕도(張鵬道)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둘째 형인 [[장덕준]](張德俊) 역시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했으며 [[훈춘 사건]]을 취재하다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 한국 최초의 순직 언론인이다.] 동생 [[장덕진(독립운동가)|장덕진]](張德震)도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 임시 정부]] 행동대원으로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 카지노를 털다 순사하였다. 서당을 다니다 [[1901년]] 연의 학교에 입학하며 신학문을 접했다. [[1907년]] 14살에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세가 더욱 기울었다. 생계를 위해 몇 년간 일본 [[영사관]] 역할을 하던 진남포이사청에서 급사로 일했다. [[1911년]] 판임관 시험[* 지금의 [[7급 공무원]],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하급 관료를 뽑는 시험이었다.]에 합격했으나, 임용을 포기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 경제학부에 입학한다. 이 때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김성수(1891)|김성수]]를 만났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 [[김규식]]과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일본]]에 가서 2.8 독립 선언에 관여하여 [[3.1 운동]]이 일어나는 데에 기여했다. 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여운형]]이 [[일본]] 당국의 [[도쿄도|도쿄]]행 요구에 수락하는 조건으로 장덕수를 통역으로 데리고 가겠다 하여 감금에서 해제, [[일본]]을 다녀가기도 했다. 전일본 대학생 웅변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장덕수의 일본어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여운형]]이 "설산 형"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때 장덕수와 [[여운형]]은 가깝게 지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張德秀.png|width=100%]]}}} || || [[1923년|{{{#292929 1923년 모습}}}]] || 1920년 4월에 [[동아일보]]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부사장 겸 초대 주간을 맡았다.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는 [[서울청년회]], [[고려공산당#s-2|상해파 고려 공산당]] 등 [[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레닌]]이 제공한 공작금을 장덕수가 빼돌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테러 위협에 시달리게 되고, 이로 인해 해외 상주 특파원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1923년 4월 [[미국]]으로 떠나, 이후 13년 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오리건 주립대학교]]를 거쳐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부인 박은혜를 만나 결혼한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 발기인으로 그 설립에 참여하고 주필로 활동했다. [[1934년]] 4월부터 9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주미 제5행서([[뉴욕]]) 재무 위원을 잠깐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1936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부사장으로 복귀하였으나, 귀국하자마자 8월 25일 터진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부사장직을 사임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기도 했다. [[1938년]] 동아일보 취체역(대표 자리)으로 다시 복귀했으나, 그 해 9월 장덕수가 한때 활동했던 '동지회' 활동으로 '흥업 구락부 사건'[* 수양 동우회 사건과 거의 같은 사건이다.]에 연루돼 체포되었으나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와 동시에 "조선 민족 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보성 전문 학교에 제출하고 사직하였으나, [[1940년]] 다시 교수로 복귀하였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장덕수는 '합법적인 공간'에서 나름대로 활발한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을 했지만, 흥업 구락부 사건 이후 사상 보국 연맹, 국민 총력 조선 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어용 단체에 참여해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는가 하면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활동에 나섰다. 이러한 [[흑역사]]로 인해 뒷날 19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1929)|임종국]]이 쓴 한국의 친일파 99인에 수록되었고,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다만, [[1940년]] 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 권고를 받고도 끝내 거부한 점, [[1941년]] 오사카에서 조선독립청년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려다가 체포된 사실이 있는 점, 그의 형 장덕진·동생 장덕준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되었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장덕수를 요시찰 명단에 두고 있었던 점 등에 비추어 논란이 있고, [[1943년]] 총독부 학무국에서 보성전문학교 전임교수 전원을 초청하여 학병 모집을 독려하는 만찬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장덕수가 분개하여 “그렇게 충성스러우면 왜 학생들보다 먼저 지원하지 않느냐”며 친일 교수들을 꾸짖고 일본인인 학무국장 오노와 경무국장 단게까지 질타했다는 증언도 있다. 한편, 친일파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인 [[한국독립당]] [[김승학]]의 보고서에 따르면[* 김승학은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서 활약하다가 광복 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고 건국유공자 심사를 맡았던 인물로, 친일파 명단을 직접 작성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겨 그의 보고서는 친일파 연구에 있어 '당대'의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원래 미국·영국에 호의를 가졌으나 일제에는 호감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친미·배일(排日)사상의 소지자였으나 위협을 느끼고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적 태도를 가지고 협력한 자”로 분류되어 있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에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결성하는데 커다란 활동을 했다. 1945년 9월부터 1947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한국민주당 외무 부장과 정치 부장을 지냈고, 1945년 11월에는 [[미군정]]청 조선 교육 심사 위원회 사범 교육 분과 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동아일보]]가 복간되면서 취체역(이사)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