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기려 (문단 편집) == 생애 == 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현 룡천군 신암리 두바위골)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운섭(張雲燮, 1877. 5. 9 ~ ?)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 영세(崔永世)의 딸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의사양반]] 역의 모델이 되었던 [[백인제]]의 수제자로 [[송도고등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 외과 조수로 입문하고 [[나고야대학|나고야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현 [[충남대학교병원]]) 외과장 자리를 추천하였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고, 아마도 백인제는 자신이 퇴임한 후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을 장기려가 이끌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나, 장기려는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세브란스 외과 [[이용설]]의 추천으로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장으로 부임한다. 1948년 7월 7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157호에 따라 한설야, 남일, 리문환, 리순근, 리동화, 허남히, 리병제, 정준택, 계응상, 태성수와 함께 고등교육원 내에 설치된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성원으로 위촉되었다. 그 이후 [[평양의학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중 차남 장가용(張家鏞)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란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다.[* 본래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사령부|UN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다친 그들을 치료했으나 50여일 뒤인 [[12월 4일]], 북한군들이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들과 [[평양]]으로 다시 들어온 다는 소식에 부인 김봉숙의 권유에 따라 남으로 피란했다.] [[김일성]]을 수술해준 인연 덕에 장기려는 북에서 매우 우대받았는데 모범근로자로 선정되어서 포상도 자주 받았고 여러차례 상도 받았다. 김일성이 [[맹장염]]으로 앓아누운 적이 있었는데, 김일성은 장기려부터 찾았지만 그와 연락이 안돼서 [[소련]] [[군의관]]이 집도했는데 북에서는 장기려가 수술했다더라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장기려의 명성은 높았고 북에서의 지위도 높았다. 심지어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교회에도 가고 예배를 할 특권도 주어졌다. 게다가 그가 월남했을 때도, 북에서는 그가 월남한 것이 아니라 남측에 납치된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덕분인지 이북에 남은 아내와 딸들과 아들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월남자 가족은 [[동요계층]], 심지어 [[적대계층]]에 편입되어서 수모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례적인 사례이다. 북에 남은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 함께 월남한 차남 장가용은 남에서 의사가 되었다. 장가용의 아들 장여구도, 원래는 목수를 꿈꾸었으나 [[중앙대학교/학부/의과대학|중앙대학교 의과대학]]을 가서 의사가 되었고, 장여구 교수의 아들도 현재 [[중앙의대]]에 재학 중이라고 하니 그 아들도 나중에 의사가 되면 '''4대 의사 가문'''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평양 철수]]로 월남한 직후에는 북에서 우대받은 일로 인해 자주 방첩부대(현 [[국군방첩사령부]])에 끌려가서 문초를 당했는데, 다행히 한 미국인 선교사가 신분을 보증해줘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평전에서는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억울하게 죽었는데]], 이러한 사회에서 온전하게 있었을까?'라는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만나고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말이 있는데 장기려 본인은 부정했다. 사실 안빈이 과학에 미쳐 인도주의적 이미지가 없는 광기 가진 인물로 그린 티가 있는 것과 이광수가 보이는 비극적 죽음을 선택한 여성을 비하한 예를 생각한다면 자기가 모델이란 점에 굉장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후에 한국 최초의 부검의가 되는 [[문국진]]이 제자인데, 부검을 1950년대만 해도 [[부관참시|두번 죽인다]]는 인식이 깊게 깔려 반대를 외쳤던 일화가 있다는 점에서 추측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눈총과 고된 업무로 지친 제자 문국진이 부검의를 관두려고 할 때 불같이 혼을 내 정신을 차리게 한 이도 장기려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부검이 일상화되었는데 여전히 부검에 대한 인식이 나빴던 한국에서는 19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김일성을 부검했다는 북한 보도에 암살의 증거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일제강점기]]때부터 외과의사로 살아왔고, 그의 아래에서 일한 제자들은 모두 다 외과 [[전문의]]이긴 하나 해방이후 국가가 주관하는 첫 외과전문의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가 되려고 공부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부산광역시|부산]]에서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이외에도 청산리병원을 비롯한 부산에 설립한 의료시설이 많다. 부산 지역 대학병원 외과의 뿌리는 장기려로 시작되거나 직간접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심지어 장기려 박사가 제2대 원장 겸 의과대학장으로 재직했던 [[부산대학교병원]]에는 장기려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초량동]]에 정식으로 장기려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지병인 [[당뇨병]]에 의한 [[합병증]]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84세.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매우 청빈한 삶을 살았으며, 향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재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수중에 천만 원 정도는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천만 원을 자신을 간병해 주었던 간호사에게 전부 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간호사가 받지 않으려고 하자 장기려 유족들이 제발 받아달라고 호소를 했다.] 별세할 때까지 본인의 개인 사택 없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옥탑방에서 기거했으며, 향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