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궈타오 (문단 편집) === 말년 === [[파일:external/www.thestar.com/the_man_who_could_have_beenmao.jpeg.size.custom.crop.738x650.jpg|width=500]] 노년의 장궈타오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죽의 장막에 휩싸인 중국의 자료가 부족했던 미국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1969년 미국 캔자스 대학의 자금 지원을 받아 회고록을 남겼다. 이 회고록은 마오쩌둥이 당을 장악하기 이전의 당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이 회고록에서 자신을 강하게 내세우며 마오쩌둥의 역할을 축소했는데, 자기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많지만, 다른 사료의 교차 검증으로 극복되는 부분이다. 다만 회고록 이후 시점의 중국이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나는 정치에서 손을 씻었다" 논평을 사양했다. 1976년에는 중풍으로 반신 불수가 되었다. 죽기 직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양로원에서 자다가 한밤중에 이불을 떨어뜨렸는데 반신불수 상태여서 이불을 도로 줍지 못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이때가 1979년 12월 3일 이었다. 사망할 때 푸대접했던 [[장제스]]와 달리 [[장징궈]]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장례까지 도와주었다. 아내 양쯔례(1902-94)도 공산주의자로, 장궈타오가 홀로 전향 후 옌안에 남겨졌지만 연좌제로 투옥되지는 않고 계속 당직을 맡았다. 이어 국공내전이 끝날 때까지 공산당과 행동을 함께 하면서 중국 임산부협회장을 맡았다. 당에서는 남편과 절연하고 이혼을 선언하라고 강요했으나 끝까지 남편과의 의리를 지켰고, 나중에 마오의 허가가 떨어지자 후에 홍콩으로 건너와 장궈타오와 지내다가 캐나다에서 생을 마쳤다. 자식들은 모두 미국과 캐나다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대학교수(수학자), 의사, 엔지니어로 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