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궈타오 (문단 편집) === 국공내전 이후 === 1946년 [[국공내전]] 재개 이후, 국민정부가 패배하여 [[국부천대]]를 단행하자 같이 대만으로 이주했지만 장제스는 더 이상 쓸데라고는 없어진 장궈타오를 푸대접하였다. 이에 분개한 장궈타오는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하였고, 1952년 [[구멍위]], [[장파쿠이]] 등 홍콩으로 망명한 저명정치가들과 함께 중국자유민주전투동맹 창설에 합류했으나 잡지 평론을 쓰면서 가난 속에서 지냈다. 중공정부 초기 신정부를 이끌 인재가 드물 때 저우언라이가 사람을 보내 "과오를 반성하면 복당을 허용하고 다시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장궈타오가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마오쩌둥과 함께 1차 전당대회에 참가했으나, 중도에 중공을 탈당하고 국민당에 붙었던 류런징과 바오후이성은 반성문을 제출하고 복당해서 대륙에서 관리생활을 했다.] 이후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67폭동]][* 이당시 마오이즘의 영향력은 홍콩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막강해서,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영화 [[몽상가들]]에서 문화대혁명 포스터가 기숙사에 붙어있는 장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이 일어나 홍콩의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영화 [[첩혈가두]]를 보면 그 상황이 나온다.] 1968년 홍콩을 떠나 미국을 거쳐 두 아들이 살고 있는 [[캐나다]]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수모를 감내하고 중국에 남았어도 [[문화대혁명]] 때 마오의 정적들은 [[홍위병]]에 의한 [[린치]], 학대와 비난을 못이겨 자살, 또는 오지로 귀양을 갔기 때문에 좋은 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마오의 정적들은 건국 후 당정군의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의 비난 대상이 되었는데, [[리리싼]]은 홍위병의 박해를 못이겨 자살했고, 마오에 반대를 한 적이 있던 [[류사오치]]와 [[펑더화이]]가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고 학대 속에 최후를 맞은 것이 대표적 예. 마오의 정적 중에서 이런 박해를 피할 수 있던 사람은 병을 핑계로 소련으로 망명한 [[왕밍]]이나 국민당으로 귀순했던 장궈타오 정도였다. 하지만 마오쩌둥도 장궈타오에게 가혹하지만은 않았고, 옌안에 남은 장궈타오의 처와 아들들에게 연좌제로 책임을 묻지 않았고, 중국을 장악한 후에 장궈타오와 지낼 수 있도록 본토에 남은 처와 세 아들의 홍콩 망명을 허가해 주었다. [[파일:external/www.paulnoll.com/Long-March-history-09-1.jpg]] 중년의 장궈타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