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군참모 (문단 편집) === 장군참모의 육성 === 전쟁대학이 개교한 이래 프로이센군은 전쟁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장군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조직으로 변모했다. 전쟁대학은 육군 조직에 최고의 [[엘리트]]를 공급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장교 자체를 양성하는 과정인 [[사관학교]]와는 달리, 전쟁대학은 일단 [[임관]]하여 [[경력]]을 어느 정도 쌓은 장교에게 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현재에도 [[한국군]]이나 미군을 비롯한 전 세계의 각국 군대엔 기관 명칭은 달라도 동일한 목적으로 고급 참모와 상급 제대의 지휘관 육성을 위해 각종 보수교육기관을 두고 교육과정에 지원한 중견 장교들을 대상으로 엄선하여 선발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원은 대개 장성 진급을 이룰 수 있다. 한국에는 [[합동군사대학교|합동군사대학]]이 있다.][* 어떤 사례를 들자면 전직 미군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 장군은 [[베트남 전쟁]] 중기 시절 [[소령]] 계급으로 포트 레븐워스의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입학하여 교육 과정(교육 내용중엔 1개 [[사단]]을 어떻게 운용하고 작전하는지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을 이수하고, 이를 2등으로 졸업해 [[베트남]]에 파병되어 일선 [[대대]]의 [[부대대장]]을 맡던 중 [[사단장]]의 눈에 띄어 공석 상태였던 그 사단의 작전참모(본래는 중~[[대령]] 자리)로 발탁되어 남은 파병기간 동안 근무했다. ㅡ 파월 장군의 자서전에서 발췌] 그리고 경력을 쌓은 장교들 중에서도 유능을 인정받는, 말 그대로 엘리트 장교 [[후보]]가 그 대상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체 육군 [[장교단]] 중 약 1,000명만이 [[입학]]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저 1,000명의 입학 [[후보생]] 중 많아야 약 200명 정도만이 입학이 가능했다.[* 전쟁대학 입학 정원은 해마다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헬무트 폰 몰트케|대(大) 몰트케]]의 시대에는 약 120명,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약 160명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대학의 입학 난이도는 [[졸업]]에 비하면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저 중 70%에 이르는 인원이 일단 중도의 3년에 이르는 [[교육]]과 [[시험]]을 따라가지 못해 교육과정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30% 중 반은 최종 졸업 시험에서 탈락하고, 이 졸업시험에 합격하는 후보생만이 장군참모 [[견장]]을 달고 나올 수 있었다. 결국 입학 후보생 1,000명 중 장군참모가 되는 인원은 그 3% 미만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3% 미만 인원은 졸업 이후부터 [[독일 육군]] 최고의 엘리트로 대우받으며 승승장구의 길을 달렸다. 나머지 인원은? 기껏해야 대령, 정말 기가 막힌 운이 붙으면 최말단 장군인 [[소장(계급)|소장]] 정도가 [[승진 상한선]]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그렇다고 예외가 없는것은 아니다. [[알렉산더 폰 린징겐]] 장군이 대표적으로, 비 장군참모 출신으로 무려 [[상급대장]]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이런 엄격한 교육을 통해 배출된 엘리트 육군 장교들은 대부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고, 우수한 장군참모 출신 장교들은 전쟁대학 [[교관]]으로 초빙되어 후진을 양성하는 선순환 효과도 발휘했다. 장군참모 제도는 최고 수준의 [[인재]]를 받아들여 엄격한 엘리트 교육을 통해 우수한 장교들을 독일 육군에 꾸준히 공급했고, 독일 육군의 우수한 작전적 능력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작전술, 제병협동, 전술, 지리, 더하여 공학 분야까지 매우 훌륭한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교육과정이었으나, 정말 '독일' 답게 전략적인 안목을 배양하는데는 무관심 했고, 미흡했다. 전간기, 세밀한 커리큘럼을 발설하지 않는 다는 조건 하에 장군참모과정을 이수한 미육군 주재무관 아서 콩거 대령은 장군참모 교육과정에 전략과, 전쟁사 과목이 부족하여, 전략적인 관점을 전혀 익히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장군참모는 폐쇄적인 엘리트 육성 방식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무훈을 세우고 [[실력]]을 인정 받은 장교라면, 장군참모 제도는 출신에 관계 없이 적극 등용하여 참모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평민]] 출신 장교들에게도 장군참모는 대표적인 출세 루트였고 실제로 [[베르사유 조약]] 이후 남은 4천명의 정예 장교 중엔 평민 출신 장군참모 장교가 많았다. 이러한 장군참모 출신들은 엄격한 교육을 통해 배출된 엘리트이자 미래의 장성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제복]] 칼라와 견장이 자기 병과색이 들어간 것이 아닌 장군참모 전용으로 따로 존재했고, [[서명]]에도 [[이름]] 옆에 장군참모임을 따로 표기할 만큼 이들의 [[존재]]는 실력 뿐 아니라 외양상으로 두드러졌다. 장군참모들은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바지 바깥쪽 양 측면에 육공군, [[경찰]]에서 각군 장군의 상징색[* 육군 빨강, 공군 흰색, 경찰 녹색.]으로 된 굵은 두 세로줄을 장군이 아닌 대령 이하라도 약간 변형된 색상[* 육군 기준으로 분홍색과 빨강의 중간.]으로 달 수 있었다. 또한 [[탄넨베르크 전투]] 때처럼,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 육군과 [[독일 국방군]] [[독일 육군(나치 독일)|육군]]에선 아예 장군참모 출신의 [[집단군]] 및 [[군단]] 참모가 각각 [[중령]]과 [[대위]] 계급임에도 자기 지휘관에게 보고 없이 소속 부대 휘하 군단과 [[사단]]에 직접 지시를 내린 사례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