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경태 (문단 편집) == 생애 == [[1983년]] [[10월 12일]],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태어났다. [[순천고등학교|고등학교]] 졸업 즈음 가세가 기울어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배도 타고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이때 고졸 학력으로는 한국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느꼈다고 한다.] 2002년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에서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고, 2004년 만 20세에 늦깎이로[* [[세는 나이]]로는 22살. 고3 현역으로 입학할 경우 보통 만 18세에 대학에 입학한다.] 등록금이 가장 저렴한 ([[서울특별시|서울]]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 속한 [[전농동]]에 위치한) [[서울시립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서울시립대학교에 입학하고도 등록금 등의 문제로 빈곤층으로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호프집, 서빙, 편의점 등 알바란 알바는 거의 다 해봤다고 한다.[* 대학생 정체성보다 알바생 정체성이 많았다고 한다.] 최소한 나처럼 힘든 사람이 세상에 없었으면 좋겠다, 국가가 교육권은 보장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정치의 시발점이었다. 서울시립대학교 재학 당시 총학생회장을 맡으며 '''‘반값등록금‘'''을 제안했고, 대학교 반값등록금 문제는 청년대학생들의 고충을 가장 잘 반영한 [[제18대 대통령 선거|2012년 대선]] 아젠다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당(2008년)|민주당]] 초대 대학생위원장에 임명돼 4번의 대선을 치르고 12번의 전당대회를 함께 했다. 15년의 시간 동안 정당 내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맡아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활동해왔다. 특히 대학생위원회와 청년위원회 활동을 하며 청년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는 데 노력해왔다. ‘민주당 인재육성 제1호’로 당의 굵직한 역사를 함께한 현실 정치 경험이 많은 인물이다.[* 2020년 7월 27일 박주민tv에서 [[박주민]] 의원은 장 의원을 “7선급 초선”이라고 치켜세웠다.] 그의 서울 생활의 시작도 [[동대문구]]였고, 정치 생활의 시작도 동대문구였다. 고향인 전남 순천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 살았던 지역이어서 애정이 깊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