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건상 (문단 편집) == 생애 == 1882년 [[경상도]] [[인동(구미)|인동도호부]] 읍내면 신곡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신동(구미)|신동]])에서 월포(月浦) [[http://chilgok.grandculture.net/chilgok/toc/GC02300629|장현도]](張顯道)의 10대손인 아버지 장운원(張雲遠)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성학(李聖鶴)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집이 경상도 [[동래]]부로 이전하면서 [[부산광역시|동래부]]에서 자랐다. 좌천재에서 한문을, 육영재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공립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가 일제의 민족 차별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 이후 [[미국]] 발프레이조 예비 학교, [[인디애나 대학교|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탈퇴하였다. 1920년 말 [[베이징 시]]로 건너가 국민 대표자 대회, [[고려공산당]] 등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 통일 회의를 조직했다. 1926년 10월 한국 유일 독립당 촉성회 집행 위원이 되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뒤 송환, 일제로부터 [[김원봉]]을 유인할 목적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 입각, 국무 위원, 학무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 후 1946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탈퇴, [[근로인민당]] 부위원장과 민족주의 민주 전선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여운형]]이 죽자 근로 인민당을 이끌었다. 1948년 남북 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 협상 기간 중 [[북한]] 측의 일방적 협상 결정에 반발하여 감금당했다가 [[홍명희]], [[김두봉]] 등과의 인연으로 풀려났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서울에서 미쳐 탈출 하지 못하여 [[여운홍]]과 함께 북한과의 악연이 다시 시작됐고 납북당할 뻔 했지만 가까스로 따돌리는데 성공하여 [[납북]]을 피할 수 있었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으로부터 내각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이러한 입각 제의는 먼 친척인 [[장택상]]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장건상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자리를 받을 경우 민족 분열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당시 같은 자리에 있던 [[장택상]]에게 정중히 거절했고 [[장택상]]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러한 거절을 전달했다고 한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원내 [[자유당]]에 입당하였다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발하여 [[호헌동지회]]에는 참여했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창당에는 불참했다. 1957년 11월 박정호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입건되었다가 풀려났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혁신동지총연맹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박순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사상범으로 투옥되었으나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석방되었다. 사후 1986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