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거정 (문단 편집) === 정점 등극, 개혁과 부정 === [[만력제]]를 등에 업고 장거정은 독재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차례로 개혁을 실행해 나갔다. 우선 관리의 탄핵을 담당하는 언관이나 각지의 서원 등의 입을 봉해 독재권을 확립하고, 낭비의 철폐, 강기숙정(綱紀肅正), (장거정의 최대 공적으로 손꼽히는) 전국적인 토지측량과 '''[[중국사/세금 제도#s-13|일조편법]]'''(一條鞭法) 등등을 실행하면서도 [[만력제]]를 철저하게 공부시켰다. 당시 지방에는 힘이 강한 향신세력(鄕紳勢力)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땅을 대량으로 적발하였다. 당시의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불공정한 점이 많았다. 일조편법은 잡다한 항목을 일관화하여 과세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당시 보급이 진행 중이던 [[은]]으로 납세하게 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나라]]의 재정이 크게 호전되어 국고에 식료 10년 분과 잉여금 4백만 냥을 축적하는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한편으로 [[언론]] 탄압, 기득권의 침해 등으로 조정과 재야에는 장거정에 불만을 품을 세력이 가득했다. 또한 황제와 다른 신료들에게는 준법과 청렴을 강요하면서도, 정작 장거정 본인과 측근들은 뇌물을 받아 부정축재를 하며 호화사치를 즐기고 일가는 강릉에 있던 요왕부를 차지하는 등 부정과 위세가 지나쳐 공분을 샀다. 이때문에 장거정 사후 이런 불만이 폭발하여 일족이 몰락했다. 특히 장거정의 아들들이 진사에 급제한 것에 대해서도 부정 논란이 일었으나 넘어갔는데, 이 또한 후에 문제가 되어 장거정의 아들들은 유배를 당했다. 이미 본인이 수보로서 권력을 누릴 동안, 선배 격이던 서계 일가는 고리대와 토지 겸병이 논란이 되어 결국 재산이 몰수당하는 와중이었음에도, 끝내 자제하지 못했다. 장거정은 또한 매번 범람하는 [[황하]] 하류의 치수사업에도 업적을 남겼다. 여기에는 반계순이라는 관료가 특히 큰 공을 세웠지만, 장거정 사후 결국 탄핵 크리. 또 외치로는 명장 [[척계광]](戚繼光), [[이성량]](李成梁)을 [[요동]]과 [[몽골]]에 파견하여 [[북로남왜#s-2|북로]](北虜, [[몽골족]])를 막고, 또 [[절강성]], [[푸젠 성|복건성]], [[광둥성]]의 해안 방어에도 주력하여 [[북로남왜#s-3|남왜]](南倭, [[왜구]])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척계광]]은 그 과정에서 군사 전법을 개선하고 정예병을 육성, 훗날 [[임진왜란]]이나 명의 방비에 활약하는 남병을 남겼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남병의 정예화와 지원 편중 등으로 북병과의 갈등과 알력이 나타나게 된다. 풍보는 궁 내부에서 [[환관]] 조직을 통제하고 태후들과 친밀감을 유지하고 장거정과의 관계를 중재하는 등, 장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577년에 장거정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당시의 유교적 예법대로라면 장거정은 당연히 [[삼년상]]을 치르고자 사직 요청해야 했지만, 상중에 [[탄핵]]될까 걱정하여 사직을 요청하지 않았다. 장거정같은 재상급 신하라면 삼년상에도 불구하고 탈정기복(奪情起復)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조선]]에서도 [[세종(조선)|세종]] 시기 [[황희(조선)|황희]] 정승, [[임진왜란]] 시기 [[충무(시호)|충무공]] [[이순신]]의 예가 있다.] 상을 치르러 낙향하면, 낙향한지 몇 달 후 임금이 탈정을 제안하고 의례적으로 몇 번 사양하여 당시로서 군신간의 권유하고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 다음, "군부(君父)에 대한 충과 효는 근본이 같다"는 식의 명분으로 사대부들에게 보여주고, 몇 달후에 상복을 입은채로 상경하여 인간의 도리를 다 하기 비록 상중이나 조정에 출사하여 상복을 입은 상태로 다시 관직에 복무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장거정은 단지 확률 100%의 의례적인 절차도 신청하지 않고, 단 몇 달 동안의 공백기간 권력 유지가 걱정되어서 사직 요청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만력제의 혼인 당시 탈정 기복의 예법에 따라 집에서 근신하든지 하여 자리를 피해야 마땅한데도, 비판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화려한 예복을 입고 앞장서서 참가하자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짐승같은 짓이라며 친 장거정파 신하들에게도 크게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장거정은 비판자들을 크게 탄압하고 권력을 유지한 채 토지조사계획을 밀고 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