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작센 (문단 편집) === 현 작센 === [include(틀:신성 로마 제국)] 구 작센 공국은 원래 엘베 강 서쪽에 있었으나 여러 차례에 걸쳐 동쪽으로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했는데, 특히 구 작센의 마지막 지배자이자 전성기를 일궈낸 [[하인리히 사자공]]은 엘베 강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1180년, 바르바로사 황제가 [[하인리히 사자공]]의 영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면서 로마 시대 이래 내려오던 유서 깊은 작센 공국은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구 작센 공국의 실질적인 후계자는 [[벨프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하노버 공국]])이었으나, 1946년 [[니더작센]] 주가 만들어질 때까지 더 이상 작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1180년부터 아스카니아 가문이 작센 공국이라는 이름을 가져가 사용했다. 구 작센의 영토를 최종적으로 재분배한 1235년의 제국의회에서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1세(Albrecht I., Herzog von Sachsen 1175~1260/61)가 구 작센 공국의 가장 동쪽에 있었던 땅인 라우엔부르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원래 [[안할트]]에서 출발한 아스카니아 가문은 구 작센의 동쪽 영토를 얻으면서 크게 성장했다. 아스카니아 가문의 영토는 3개의 지역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슐레스비히홀슈타인|홀슈타인]]의 남동부인 라우엔부르크의 북부, 안할트의 중부, [[비텐베르크]]의 동부 3개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북부는 하인리히 사자공이 새로 병합한 변경지역이었으며, 안할트와 비텐베르크는 아스카니아 가문의 본령으로 엄밀히 말하면 작센과는 무관했다. 안할트 백작이자 초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브레히트(Albrecht der Bär 1100~1170)[* 1138~1142년에는 작센 공작이기도 했다.]는 죽기 전 맏아들 오토에게 브란덴부르크를, 막내 베른하르트에게 안할트와 라우엔부르크 및 비텐베르크를 물려주었고, 베른하르트는 다시 맏아들 하인리히에게 안할트를, 차남 알브레히트[* 위에서 언급되는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1세]에게 비텐베르크와 라우엔부르크를 물려주었다. 작센계 아스카니아 가문의 영토는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1260년 영토를 분할하여 북부는 작센-라우엔부르크로, 남부는 작센-비텐베르크로 나누어졌다. 이 두 분파는 황제 선출권 문제로 치열하게 경쟁하다 결국 [[금인칙서#s2.8|1356년의 금인칙서]]에서 장자 계열이었던 작센-비텐베르크가 [[선제후]]로 인정받았다. 1422년 작센-비텐베르크 가문이 3대 5명만에 대가 끊기자 독일왕 [[지기스문트]]는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 아스카니아 가문,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을 거쳐 1415년에 지기스문트가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수여했다.]과 아스카니아 가문 작센-라우엔부르크계의 요청을 무시하고 [[후스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위와 선제후 지위를 수여하면서 프리드리히 4세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작센)|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마이센 변경백의 영지를 구성하는 오스터란트[* 지금의 [[라이프치히]] 주변 지역], 라우지츠 등과 작센-비텐베르크를 합쳤고, 지금의 작센 주의 기원이 되었다. 현재의 작센주 문장도 베틴 가문의 깃발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튀링겐]] 방백령까지 상속받아 베틴 가문의 모든 영지를 통합했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둘째 아들 알브레히트가 영지 분할을 요구하여, 1485년 라이프치히 조약으로 동생인 알브레히트가 마이센 변경백령과 북부 튀링겐을 상속받고 이는 작센 주로, 형인 에르스트가 작센 서부인 현재의 작센-안할트 주 지역의 비텐베르크와 남부 튀링겐을 상속 받아 이는 튀링겐 주로 이어진다. 이후 [[마르틴 루터]]의 등장으로 [[루터교회]]가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시대의 현재의 작센 주 지역은 작센 선제후의 강력한 적대자였던 작센-마이센 공작 게오르크의 영향으로 가톨릭 지역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마르틴 루터 시기엔 [[베틴 가문]]의 종가 에른스트 계열이 작센 선제후로서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를 보호했으나, 알브레히트 계열의 게오르크 공작은 사촌과 영지 분쟁으로 갈등관계인데다가 영지인 [[라이프치히 대학교]][* 애초에 라이프치히 대학교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가 후스 전쟁에서 쫓겨난 독일인 교수들과 학생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세웠다.]의 학풍이 [[보헤미아 왕국]]에서 [[얀 후스]] 시기 쫓겨난 가톨릭 성향의 [[독일인]] 교수 학맥으로 이어지다보니 개신교까 성향이 강했다. 따라서 현재 작센 주 지역은 [[종교 개혁]] 시기 강력한 개신교 적대세력이었다. 게오르크 공작은 자신의 후사인 동생 하인리히가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독일과 보헤미아의 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에게 영지를 증여하려 했으나 급사했고, 하인리히가 작위를 이어받자 하인리히의 아들인 모리츠는 아버지가 개신교로 개종했기에 영지를 물려받기 위해 개신교로 개종한다. 그러다가 1547년 루터 사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앙집권화와 종교일원화 정책에 반발한 개신교 제후들이 맺은 슈말칼덴 동맹을 분쇄할 목적으로 [[슈말칼덴 전쟁]]을 일으켰고, 베틴 가문 알브레히트 계열의 수장이었던 [[모리츠(작센)|모리츠]]는 자신이 작센 선제후가 될 목적으로 카를 5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어,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 근처 뮐베르크 근처에서 베틴 가문 에른스트 계열의 6촌 친척이자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위시한 슈말칼덴 동맹군을 격퇴시켜, 에르스트 계열 베틴 가문이 갖고 있던 선제후의 지위를 빼앗고 비텐베르크에서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에 이르는 작센 지역(현 작센-안할트)을 획득했다. 이는 1555년 9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에른스트계가 군말 없이 서명하면서 최종 확정되었다. 17세기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중립을 지키다가 [[페르디난트 2세]]가 복원 칙령을 발표하여 가톨릭 교회를 강화하려 하자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지지하였으나, 구스타브 아돌프가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대패하자, 편을 바꾸어 가톨릭 편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붙었다. 이에 스웨덴군의 보복으로 인해 많은 참화를 입긴 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보헤미아 왕국의 [[라우지츠]]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1697년에는 [[아우구스트 2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아들 대인 [[아우구스트 3세]] 대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동군연합]]으로 두기도 했다. 1804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빌붙어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 왕국]]으로 격상시켰다. 1806년엔 [[프로이센 왕국]]의 협박으로 나폴레옹에 맞서 전쟁을 선포했으나 프로이센이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참패하자 나폴레옹과 다시 손을 잡았고, 프로이센이 2, 3차 [[폴란드 분할]]에서 차지한 영토를 분리시켜 건국한 [[바르샤바 공국]]의 군주를 겸임했다.[* 앞서 말한대로 작센 선제후는 바르샤바 공국의 전신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위를 겸임한 적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멸망 직전의 왕족이었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포니아토프스키]]나 자신의 친척이 아닌 굳이 작센의 왕을 군주로 삼은 것은 작센을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견제용으로 키워보려는 전략에 더해 바르샤바 공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부활로 비추어져 폴란드 분할에 참여했던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를 자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813년 해방전쟁 이후 나폴레옹을 계속 지지한 대가로 1815년에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영토의 북쪽(당시 작센 영토의 절반 이상)인 비텐베르크, 토르가우, 북부 튀링겐, 라우지츠 대부분을 프로이센에게 할양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한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편을 들었고,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남은 영토마저 프로이센에 합병될 위기에 처했다. 같이 오스트리아를 편들었던 [[하노버 왕국]], 헤센 선제후국, [[나사우#s-1.2|나사우 공국]]은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작센은 프로이센이 너무 커지는 것, 또 완충지대를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한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견제로 합병되는 것만은 면했다. 대신 프로이센 주도의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면서 통일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에 발생한 [[킬 군항의 반란]]의 영향으로 일어난 혁명으로 국왕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국왕이 퇴위하면서 현재의 명칭인 작센 자유주로 바뀌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지했다. 1945년 [[소련군]] 점령지가 되었다. 새로 신설된 독폴 국경에 의거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 동쪽 지역은 [[폴란드]] 영토가 되는 대신 강 서쪽의 [[슐레지엔]] 영토(대표적으로 [[괴를리츠]])를 흡수하였다. 그래도 상실한 영토는 기존 영토 14,986km²에 비하면 142km² 로 1% 수준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잃은 곳은 대표적으로 현 [[보가티니아|Bogatynia]] (구 Reichenau in Sachsen). 전체가 독일 영토에서 사라진 [[동프로이센]]과 96%를 상실한 [[슐레지엔]], 절반만 잔류한 [[포메른]]과 1/4이 사라진 [[브란덴부르크]]에 비하면 폴란드에 흡수된 구 작센 지역은 매우 미미했다. 1952년에 이르러 [[동독]] 중앙정부가 주정부들을 해체하자, [[드레스덴]] 관구와 [[켐니츠|카를마르크스슈타트]] 관구와 [[라이프치히]] 관구로 나뉘어졌으나, 1990년에 이르러 동서독 양국의 평화통일을 실행하기 직전에 주정부가 부활하였다. 그리고 통일 이후 영토 재편을 거쳐 지금은 18,449.90km²km² 가 되었으며, 동독 시절에 비하면 작센안할트 지방 쪽의 영토를 조금 더 가져와서 넓어진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