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치통감 (문단 편집) == 특징 == 사마광 개인이 모두 편찬한 것은 아니다. 시대별로 나눠서 다른 학자들이 편찬하기도 했고, 북송의 [[영종(북송)|영종]]도 편찬국까지 설립해 지원해주는 등 정부의 도움도 받았다. 간단히 말해 《자치통감》은 정부가 주도해 편찬한 《[[삼국사기]]》와 사마천 개인의 노력으로 완성된 《[[사기(역사책)|사기]]》의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사마광이 지어 올렸던 《통지》(通志) 8권을 기초로 하여 《구오대사》를 따라 《[[춘추]]》의 규범을 모방했으며, 《[[춘추좌씨전]]》의 서법을 따라서 완성했다. 정사를 비롯한 물론 실록(實錄), 야사(野史), 묘지류(墓誌類) 등의 사료 322종의 각종 자료를 인용했다고 한다. 사마광이 《자치통감》 편찬에 《춘추》 필법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음은 상당히 명교적인 선택으로서 그의 문집에 남은 여러 글들이나 당시의 저명한 《춘추》전문가였던 유창과의 편지 교환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역사가들이 전문 분야를 맡아서 정리했다는 부분은 사서 편찬에 있어서 선구적인 방식으로서, 한나라 시대의 파트는 유반, 삼국시대~남북조시대(위진남북조시대)는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 유서가 맡고[* 특히 남북조 파트의 완성도가 대단해서 사마광 본인이 "나는 이걸 그냥 받기만 하면 되겠는걸." 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의 파트는 사마광의 제자 범조우가 맡았다.[* 특히 수•당 부분은 《[[신당서]]》 이후 새로 수집한 자료도 써서 사서의 정밀도가 높아졌다.]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 고군분투하여 《사기》를 저술했던 사마천보다는 훨씬 훌륭한 환경에서 저술 작업을 시행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마광 본인이 "'''내 온 힘을 이 책에 다 쏟았다.'''" 할 정도로 내용에 열과 성의를 들였다. 중국의 명역사서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으며, 지금은 산일되고 없는 사마광 당시까지 전해지던 사료를 적지 않게 수록했기에 유력한 사료라고 주목받는다. 중국사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사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필수자료이다. 주요 사건들에 대해 '신광왈'(臣光曰, 신 사마광은 말한다)이라 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탈고한 후에도 스스로 '이건 따로 고증이 필요하겠는걸' 이라고 생각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사료 고증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을 저술하기도 했다. 《자치통감연표》 30권도 존재하고, 사마광 본인이 본편의 목록과 범례를 정리한 《통감목록》(通鑑目錄) 30권이나 《통감석례》(通鑑釋例) 1권도 있다. 《계고록》(稽古錄) 20권은 본편에서 사마광 본인이 '이 부분은 좀 부족하지?' 싶은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삼국시대]]의 [[위(삼국시대)|조위]]를 정통으로 보지 않은 역사서라는 점에서 《[[삼국지]]》([[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를 다룬 사료에서는 특기할 만하다. 물론 연도를 세는 기준으로 위•진의 연호를 채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삼국시대)|조위]]만 정통으로 내세우고 [[촉한]]과 [[오(삼국시대)|손오]]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특히 촉한에 대해선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 촉으로 칭한 것을 본래 국호였던 한으로 표기하였다. 즉, 사마광이 '''위•진에 치우친 서술을 했다는 것은 세간의 오해'''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자치통감》이 나온 이후부터 종종 있어왔던 듯 하다. 당장 주자부터가 촉한을 정통으로 내세우면서 《강목》을 지었고, 조선의 성대중이라는 학자는 사마광을 비판하며 위•진을 정통으로 내세웠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에도 [[미야자키 이치사다]] 같은 권위자마저 《중국중세사》에서 '위를 정통으로 하여 기술했다'라고 적어놨을 정도다. 심지어 [[사마부]]가 사마광의 조상이니 위•진에 곡필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의 시선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예컨데 위나라의 입장에서 촉한이나 동오의 침입을 침구(침탈)라고 적었다던가. 위나라의 군주는 황제로 적고, 촉한과 오나라의 군주는 각각 한주, 오주로 적는다던지...그러나 이는 오해로, 25사의 선구주자인 사마천의 《사기》도, 삼국시대 매니아들이 흔히 보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도 갖고 있는 한계다.] 《자치통감》을 읽다보면 사마광이 이 부분에 있어 공정성에 신경을 쓴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사마광이 '''무통설'''(無統說)로 입장을 정하면서 [[조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의 대립을 어느 정도 일단락시킨 점과 조씨와 본인의 조상인 사마씨가 [[전한|한]][[후한|나라]]와 [[위(삼국시대)|위나라]]의 황위를 찬탈하고, [[위(삼국시대)|위나라]]와 [[서진|진]][[동진|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점에서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사마광이 [[사마부|조상]]의 영향을 받아 위진정통론 신봉자였다면, 그 전신인 조조의 황위 찬탈 과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사마씨의 황위 찬탈 과정을 어떻게 해서든지 미화했을 것이다.] 게다가 《[[정사 삼국지]]》 번역 중 [[김원중(번역가)|김원중]]역이 하도 안 좋은지라 삼국시대를 보는 데 있어 이 책이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침 《자치통감》은 《삼국지》와 달리 편년체라서 끊김없이 읽기에 편한 것도 한 몫한다.] 하지만 이 책이 위 정통론을 주장한다고 착각하는 촉한의 팬들과, 이 책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무리들 때문에 《자치통감》의 무통설이 퇴색된 감도 있다. 참고로 《삼국지》의 시대로 잡는 [[황건적의 난]]부터 [[삼국통일]]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부분은 <한기>(漢紀) 부분인 58권 초반부터 <진기>(晉紀) 부분인 81권 초반까지 대략 23권쯤 되는 분량이다. 사마광은 본인부터가 이미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정치가였고, 따라서 《자치통감》은 사마광 시대까지의 역사서를 단순 요약한 것이 아니라 옛 사료들을 정치적 이성으로 재해석하여 새롭게 편집한 역사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사기]]》에 실린 '상산 4호'(商山四皓)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는 장량이 "유방이 얻지 못한 은거 선비들인 상산 4호를 얻으면 황태자의 위치가 확고해진다"며 여후에게 권했고 유방이 그들이 황태자를 따르는 것을 보고 황태자를 바꾸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사마광은 유방이 폐태자하려다가 뜻을 바꾼 일에 대해 전설 같은 '상산 4호' 이야기를 사료로 채택하지 않았고, 그렇게 성질이 사나운 유방이 은거 선비들 몇몇이 말린다고 뜻을 꺾었을 리 없다며 '''당시 장량을 비롯한 조정의 세력이 강한 정치가들이 황태자 편이었기 때문에 황태자를 바꾸지 않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증명했다. 사마천의 《사기》가 '문학가가 저술한 역사서'라면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정치가가 저술한 역사서'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는 두 사람의 사서 서술 당시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경우엔 혼자서 중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전해지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선택하여 서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마광은 유서와 범조우를 비롯한 최고의 학자들과 함께 조정의 지원을 받아 많은 사료들을 수집하여 고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저술하며 제왕이 여가에 만기(萬機)를 친람할 수 있는 역사책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제시하였다. 제왕이 보는 이유는 정치를 잘하기 위해서이다. 사마광은 정치를 잘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제국의 흥망과 성쇠''', 둘째는 '''신민의 생업과 안정'''이다. 그중에서 제왕으로서 지지할 만한 것과 경계해야 할 것, 즉 제왕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 그 내용이라고 하였다. 실용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또한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천하는 모두의 것이고'''(天下爲公)[* '''천하위공'''이라는 4자로도 알려졌다. 20세기 초에 중국의 군주정을 종식시키고, 공화정을 출범시킨 [[쑨원]]의 좌우명이 되기도 했다.]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以人爲本)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신민이 고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황제(임금)는 가볍다." 라는 《[[맹자]]》의 '''민귀군경'''(民貴君輕)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천하위공의 자세는 >"대저 관직은 폐하의 관직이 아니라 천하의 관직입니다." 란 말이 그 실체를 잘 말해준다. 이는 관직이란 현명하고 유능한 적임자에게 수여하여 사회와 제국을 함께 다스리는 공공 도구이지, 위정자나 통치자가 사사롭게 지지하는 인물에게 내리는 보상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 사마광은 역사의 여러 사례를 통해 문화와 교육을 통해 개인의 품성으로 내면화한 명분과 도의의 덕성은 부단한 수신 과정에서 일상 속의 자기 절제력으로 승화되고, 더 나아가 매우 현실적인 검약과 겸양의 가풍으로 확장되며, 궁극적으로는 명분과 대의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기풍으로 보편화하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 기풍은 법이나 규제로 지탱되는 강제적 질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실천과 참여로 유지되는 느슨한 구속력이다. 하지만 이 느슨한 구속력은 명예와 염치와 도의를 중시하는 사회 전체 분위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어떤 강제적 구속력보다 더 끈질기고 지속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사마광은 이처럼 기본적으로 '정치가'답게 중국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과거의 사례들을 돌이켜보면서 사료들을 엄밀히 선별하고 검증하여 《자치통감》이 명저가 되도록 했다. 이후의 역사서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자치통감》 이후 《자치통감》의 전례를 따른 역사서가 많이 나왔지만, 《자치통감》 이상의 역사서는 나오지 않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학자들은 물론 공부를 좋아하는 군왕들의 No.1 필독서이자 애독서였다. 주석 가운데는 송말 원초의 문인 호삼성(胡三省, 1230~1302)의 주석인 이른바 《호주》(胡註)가 가장 유명한데 본편의 기사를 보정하고 새로운 사료를 덧붙이는 등 훌륭한 주석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호삼성 본인의 평론은 다분히 흥망에 대한 감개가 많이 담겼다는 평가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사람은 [[애산 전투|한족의 남송 왕조가 몽골족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그 엄청난 시대의 풍파를 목도했던 사람이다. 또한 [[문천상]](文天祥)이나 [[육수부]](陸秀夫)는 호삼성과는 진사과 급제 동기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중국으로 사신들이 떠날 때면 임금님들이 꼭 《자치통감》 한 질 챙겨오라고 당부하거나, [[명나라]]의 황제들이 [[조공]] 답례품으로 쏘는 기사도 자주 보인다. 책 한 권을 답례품으로 내리다니 말이 되겠냐 싶겠지만, 후술하듯 책은 1권 사는데 쌀 몇말을 들여야 할 정도로 정말 비쌌고, 특히나 총합 백 몇십권이나 되는 《자치통감》의 전권은 중국 내에서도 부자나 명문가 정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소유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답례품으로는 딱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명실공히 《자치통감》덕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애독하여 [[경연]]에서 《자치통감》을 강연하게 했고, 스스로 해설서를 붙여 간행하기도 했으나, 이 책의 분량이 분량인 만큼 세종의 [[시력]]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는 데도 일조했다. 집현전의 인재들을 총동원해 펴낸 이 주석서가 바로 《자치통감훈의》로, 세종은 세종 16년에 이를 편찬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6026_002|세종 16년 6월 26일]]) 이것을 간행하기 위해서 전국을 수소문해 호삼성이 음주를 단 《자치통감》 일부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했고, 이걸 바친 사람은 훗날 '''그 덕분에 [[연좌제]]에서 벗어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3005_002|세종 17년 3월 5일]] 세종은 이후 [[청주시|청주]] [[향교]]에 《자치통감훈의》를 비롯한 서적을 하사하기도 하는 등 《자치통감훈의》의 보급에 힘썼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8014_001|세종 26년 8월 14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