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민주연합 (문단 편집) === 균열과 [[16대 총선]] 참패 === 그러나 DJP연합이 2년차에 접어들던 1999년 말에 자민련과 국민회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 이전에도 지방선거 기초단체장 후보 및 광역의원 후보 연합공천에서의 신경전, 각료 배분을 둘러싼 신경전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신경전이었지, 틈이 벌어질 정도까진 아니었다.] 두 당은 [[내각제]] 개헌,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 재벌개혁 등 여러 분야에서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7월 내각제 개헌 추진 포기를 합의하자 자민련 내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 공동정권 철수 같은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다.[* 김종필 총재의 최측근으로 [[DJP연합]] 성사의 일등 공신이었던 [[김용환(1932)|김용환]] 의원은 아예 자민련을 탈당해 [[희망의한국신당]]을 창당했다. 김용환은 이후 극렬JP까로 변신해서 계속 김종필에게 부담이 되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결국 합당은 물 건너 갔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의 양당 연합공천이 무산되었다.[* 다만 김대중 대통령이 약속대로 내각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하더라도, 개헌엔 전체 의원의 2/3 동의가 필요한 만큼 야당인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한 통과는 불가능했다. --성의 표시라도 해주지...--][* 합당을 고려하여 지연되던 국민회의의 재창당은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의 창당으로 현실화 된다.][* 연합공천이 무산된 이유는 당시 공동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간의 1인 2표제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컸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1인 2표제 도입을 주장했으나,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반대했다.(1인 2표제는 1인 1표제가 위헌 판결을 받은 이후인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7대 총선]]부터 적용됐다.) 새천년민주당의 연합공천 전제가 1인 2표제 찬성이었는데, 자민련이 이에 반대하면서 연합공천 자체가 무산되었다.[[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000209/7506880/1|#]]] 그러나 자민련이 연합공천을 거부하고 호기롭게 16대 총선에 나선 결과는 '''대참패'''였다. 일단 '''비충청권 지역에선 모조리 망했다.'''[* 4년 전 15대 총선에서는 반민자당, 비민주당 정서에 힘입어 충청권을 필두로 수도권과 강원도, TK(대구경북) 지역에서 反[[신한국당]] 보수표를 끌어모아 다수의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50석을 차지했었다. (지역구 41석, 전국구 9석)][* 지역구 41석 중 충청권에서 24석을 획득했고(대전 7석 싹쓸이, 충남 12석, 충북 5석) 충청권 이외의 지역에서는 17석을 획득했다.(대구 8석, 경북 2석, 경기 5석, 강원 2석)] 16대 총선에서 비충청권 지역구에서 승리한 자민련 후보는 경기도 연천군·포천군의 [[이한동]] 총재 단 한 명뿐이었다.[* 이한동은 1981년 11대 총선부터 계속 당선될 정도로 지역 기반이 탄탄한 거물이었고, 11대 총선을 제외하고, 12대 총선 이후부터 항상 5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김대중 정부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비충청권 지역, 특히 영남 지역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 몰표를 던지고 연립정권의 공동여당이었던 자민련은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박철언]]이 대표적인 예다. 항상 과반이 넘는 득표를 올려 대구 [[수성구]]의 왕으로 불리다 24%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자민련이 15대 총선 이후 국민회의와 연대하면서, 지지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여론이 컸던 것이다.[* 15대 총선 당시의 지지층들은 보수의 주도권을 민주계 보수가 아닌, 기존의 민정계 보수 또는 공화계 보수(소위 원조보수)가 쥐는 것을 원했기에 자민련을 밀어준게 컸다. 더구나 집권 전이나 후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DJP연합이 시작된 이후부터 자민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은 한나라당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15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은 TK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박근혜]]를 영입했고, 선거 결과는 근소한 패배로 끝났으나, 자민련으로 넘어갔던 민정계 보수 또는 공화계 보수(소위 원조보수) 유권자의 표를 한나라당 쪽으로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TK지역에서 자민련의 영향력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면 충청권은 석권했느냐? 그렇지도 않았다.''' 연합공천이 무산된 이후 새정치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을 개편하고 충청권 출신의 유력 대권주자 [[이인제]]를 앞세워 충청권 공략에 나선다.[* 경기도 안양에서 두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경기도지사]]를 지냈던 이인제가 지역구를 옮겨 자신의 고향인 충남 논산에 직접 출마하면서 대전, 충남에서 민주당 바람을 일으켰다. 자민련은 이인제의 상대로 현역 의원 김범명을 그대로 공천했고, 졌다.]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분열을 틈타 공천을 시도해 선방. 반면 자민련은 대전 3석, 충남 6석, 충북 2석에 그치며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대전은 한나라, 민주당이 각각 1석, 2석을 차지하며 6석 중 절반인 3석에 그쳤고, 충남은 가장 많은 당선자(6명)를 냈지만 새천년민주당에서 무려 4명을 당선시켜 상당수 의석을 상실했으며, 충북은 한나라당이 3석, 새천년민주당이 2석을 얻어 절반에도 한참 못 미쳤다.] 자신들의 텃밭인 충청권에서조차 절반도 안 되는 1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1998년 지방선거]] 당시 충청지역 기초단체장 후보를 보면,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광역단체장 선거와는 대조적으로 기초단체장에서는 연합공천이 무산돼 각자 후보를 낸 곳이 대다수였다. 그래도 이 당시에는 김종필이라는 네임밸류가 꽤 높았고, 충청권에서 자민련의 지지세가 견고했기 때문에, 연합공천이 무산돼 각각 후보를 냈다고 해도, 자민련이 충청권 기초단체장 대다수을 획득했다.[* 그렇지만, 당시 자민련 내부에서는 충청권 일부 기초단체장을 국민회의, 무소속에 내준 부분 때문에, 공동정부에서 자민련의 위상에 손상이 갔다고 판단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8060900289105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8-06-09&officeId=00028&pageNo=5&printNo=3214&publishType=00010|#]]] 하지만, 1999년 여름, 김종필 국무총리가 내각제 문제를 둘러싸고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반발한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가 탈당하여 독자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자민련의 충청권 정세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후 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을 탈바꿈하고, 연합공천이 무산된 이후, 충청권의 대표 주자 이인제를 필두로 충청권을 공략하면서, 자민련은 충청 지역에서 크게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이전 선거]]와는 정반대로 김종필이라는 메리트가 반감되었기 때문에, 본거지인 충청 지역에서조차 반토막이 나버린 것이다.] 결국 전국구(비례대표) 5석을 포함하여 총 17석을 획득하면서 15대 총선의 50석에 비하면 1/3로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20석도 얻지 못하여 원내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는 굴욕[*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면 국가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고, 국회 상임위의 위원장이 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다.]을 겪게 된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도 피해를 안 받은 것이 아니었다. 연합공천 무산으로 자민련에 돌아갈 의석들이 한나라당으로 가버린 격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민주당과 자민련이 '''연합공천 실패로 날린 의석 수를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무려 27석'''[* [[한나라당]]에 26석, [[희망의한국신당]]에 1석.]이나 날려먹었다. 만약 민주당과 자민련이 [[2회 지선]]과 동일하게[* 민주당: 서울, 경기, 부산, 경남, 광주, 전남, 전북, 제주 / 자민련: 강원, 인천, 충남, 충북, 대전, 울산, 대구, 경북.] 연합공천을 하고 비례대표 배분율을 2:1로 했다 가정하면 자민련은 '''충청권 24석 중 23석'''[* 대전 1석은 무소속과 분열돼 한나라당이 당선된 거라 연합공천을 해도 그대로 한나라당이 이겼을 것이다.], 강원 6석, 인천 9석, 경북 2석, 비례 8석으로 '''총합 48석'''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외에는 한나라당 107석, 새천년민주당 111석, 민주국민당 2석, 무소속 5석이 된다. 이 때 연합공천 무산으로 인한 여야의 의석 수 변화를 보면 '''여당 163석 → 136석'''[* 민주당 111석 → 115석, 자민련 48석 → 17석, 호남계 탈당파 4석 그대로.], '''야당 110석 → 137석'''[* 한나라당 107석 → 133석, 민주국민당 2석 그대로, 희망의한국신당 원외 → 1석, 무소속 정몽준 1석.]으로 민주당과 자민련이 연합공천 무산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연합공천 실패로 인해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안정적 과반 확보 실패로 국정 운영에 난항을 겪게 되었고, 자민련은 교섭단체 구성 실패와 더불어 충청권 이외 지역에서 사실상 기반이 전멸당하는 결과를 받게 되었다.[* 반면, 당시 야당들은 모두 이득을 보았다. [[한나라당]]은 133석을 얻어 1당 지위를 공동여당으로부터 탈환했고,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은 후에 연립여당이 될 기회가 생겼으며 [[희망의한국신당]]은 원내로 진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