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당 (문단 편집) ==== 이승만 탄신 80주년 경축금 ==== 자유당정권 하에서 가장 황당한 은행대출은, 아마도 1955년 실행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경축금''' 대출일 것이다. 그 해 봄 [[대한민국 국무원|국무원]] 사무국에서는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 탄신경축중앙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에 [[이기붕]]을 추대했다. 위원회에서는 [[이승만]]의 팔순을 축하하는 경축금 3억환을 상납하기 위해, [[전국극장연합회]]를 조직하고, 극장 입장객으로부터 10~20환씩 더 거둬 그 돈을 조성하기로 했다. 입장권이 200환 미만이면 10환, 200환 이상이면 20환을 더 걷는다는 것이니, 관객들의 호주머니를 강제로 털어서 자신들이 [[이승만]]에게 잘 보이겠다는 심보였다. 1955년 3월 26일에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대한뉴스’에 따르면 "당일 아침부터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에서 ‘80회 탄신’을 축하하러 온 방문객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외교사절로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내한한 미국의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필리핀 공사 테일러 우드, 콜터 장군, [[김홍일(군인)|김홍일]] 주 자유중국 대사, 왕동원 자유중국 대사 등이 잇따라 예방했다. 이어 국내 3부 요인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찾아와 ‘80회 탄신’을 축하했다. 접견을 마친 이 대통령 부부는 승용차 편으로 서울운동장으로 출발했다. 이 곳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시민과 학생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숙명여고와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고, 그 주변에 ‘만수무강’이란 글자를 만들었다. 군인들까지 대거 동원됐다. 서울운동장 하늘에는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다.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생일을 축하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였다. 여기에는 국군의 날처럼 탱크부대까지 동원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지방에서는 탄신 경축 기념식수와 경축 경노잔치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내에는 ‘탄신’을 축하하는 꽃마차까지 다녔다. 여성 궁사들을 동원해 기념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경축금을 전달하려면 당장 현금이 필요했고, 관객들에게 돈을 거두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한다. 그래서 4대 시중은행에서 먼저 대출을 받아 충당키로 한 것이었다. 위원회 [[이기붕]] 위원장을 채무자로 하고, 극장연합회 간부 [[임화수]](이승만이 총애하던 정치깡패)를 비롯한 4명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4개 은행이 공동으로 3억환의 대출을 실행했다. 이 돈은 [[이승만]]의 동상건립기금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 후 1959년 4월까지는 전국의 극장에서 거둔 돈으로 원리금을 갚아나갔으나, 4월 혁명이 터지자, 원리금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채무자인 [[이기붕]]은 혁명 직후 자결했다. 따라서 4개 은행은 1960년 11월 24일 현재 652만5944환의 부실채권을 안게 됐다. 이에 은행들은 연체대출금 상환을 전국의 각 극장에 요청했으나, 채무자도 아닌 극장들이 갚을 리 만무했다. 할 수 없이 은행들은 임화수 등 4명의 보증인에게 대출금상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물론 승소했다. 그러나 임화수와 백운성 등에게는 압류할 만한 변변한 재산이 없었기에, 연체대출금은 대부분 끝내 회수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