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위대/역사 (문단 편집) == 1954-1960 == [[해상자위대]]는 제국 해군이 쓰던 '''[[욱일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구 일본 해군의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는 해상자위대의 창설 멤버가 구일본 해군 그대로였기 때문으로, 육군 멤버의 경우 육상자위대 창설때 [[경찰]] 간부의 비율과 비례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셈이다. 물론 기존의 해상보안청 소속 인력을 충원하기도 했다. 그래봤자 [[육상자위대]]도 '''한국전쟁 이후로는 구 일본육군 출신을 다수 입대시켜서 결국 경찰출신을 능가하게 되었다.''' 일단 군대 비슷한 조직을 꾸려나가기에는 경찰출신 간부들은 완전히 다른 조직운영에 대해서 무능함을 노출했다. 최고위 장성급에선 [[내무군벌]]과 구 [[일본군 육군]] 출신들이 대결했다. 이렇게 전후 처리과정에서 일본 해군이 육군과 판이하게 다른 대접을 받은 것은 강력한 전력[* 일본 해군은 2차세계대전 당시 스펙상으로는 세계 3위의 전력으로 총배수량은 4위와 5위였던 프랑스 해군과 이탈리아 해군을 합쳐도 약간 더 많았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문제점 투성이였지만.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참고]의 해군을 유지해 왔던 [[일본 해군]]의 노하우를 보존, 활용하려는 미군 측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도 해상자위대는 사실상 구 일본 해군의 계승성이 굉장히 명확하다. 당장 구 [[일본 해군]]의 기지였던 [[구레]]등의 부대의 경우 창립연도를 구 일본 해군으로 잡고있다. --해군선옥론이 판칠만 하다-- 1954년 이후론 게이단렌이나 미국 국방부를 중심으로 방위력 증강안이 나왔다. 미군은 한국과 일본, 대만의 주둔 규모를 축소하길 원했고 그 반대급부로 한국군과 자위대, 대만군의 무장 강화를 원했다. 게이단렌과 방위생산위원회는 육군 15개 사단 30만명, 해군 29만t 7만명, 항공병력 3,750대 13만명이라는 엄청난 규모를 제시했지만 무시됐고 미국의 월터 로버트슨 국방차관보는 육군 10개 사단 32만5천명, 해군 프리깃 18척 등 1만3천5백명, 공군 작전기 800대 3만명 수준을 내세웠다. 일본 정부는 육상 10개사단 18만명, 해상 호위함 74척 등 3만1천명, 공군 항공기 518대 등 3만1800명 수준을 제안했다. 일본 정부의 안인 이케다 시안이 대략적인 증강안이 되었다. 이런 증강에는 1952년 26만이었던 [[주일미군]]이 1960년에 4만6천명 수준까지 감축됐다는 배경이 있다. 이후부터 자위대는 헌법 9조의 해석을 두고 점점 확대됐는데 '필요 최소 한도의 무력을 유지하는 것은 헌법 9조가 금지하는 바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주로 사용했다. 필요 최소 한도의 수준은 시대 상황이나 기술 진전 등에 의해 계속 변화되는 요소이므로 자위대의 증강에 구속 조건을 사실상 제거한 셈이다. 다만 선제공격 등의 무기나 교리를 채택하지는 못 했다. [[한국전쟁]]이란 특수가 끝나면서 일본의 군수 업계는 자위대의 국산화에 사활을 걸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