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위대/역사 (문단 편집) == 1945-1950 ==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의 비군사화(demilitarization, 비무장화)와 민주화(democratization)를 천명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미 국무부는 전후계획위원회를 설치하여 일본 점령 후의 정책을 구상했고 종전후 1945년 12월말에 일본군은 거의 해산이 되었다. 1945년 9월 15일에 [[대본영]], 10월 15일에 군령부가 폐쇄되었고 12월 1일엔 육군성과 해군성이 폐지되었다. [[전범]]과 이들과 밀접 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해산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구 체제 단체 해산과 추방 등이 이뤄졌는데 육해군의 정규[[장교]]와 [[직업군인]]이 모두 포함되었다. 다만 군이 해산된 상태였기 때문에 장교나 부사관을 추방할 필요는 없었고 공직에 있던 군인이나 전쟁에 적극 협조한 일반인을 추방했다. 그 규모는 1천명 수준이었다. 11월엔 [[군인연금]]까지 폐지되면서 구 일본군 출신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특히 [[맥아더]]와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는 [[일본 헌법]] 9조에 전쟁 포기, 전력 비보유 항목을 넣었다. 군이 재편될 가능성을 없앴는데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일본 공산당]]까지 자위 전쟁을 포기하는 건 지나치다고 반론할 정도였다. [[요시다 시게루]]는 당시 평화헌법을 참의원에서 해당 의원들에 반론하며 해당 헌법을 옹호했는데 정작 1950년대에 이르자 9조의 해석을 바꾸는 식으로 일본을 재무장시켰다. 당시 그의 발언을 보면 이중적인 행동 탓에 스스로도 오락가락하는 게 많았다. 당시 전쟁에 대한 염증이 심했던 일본 민중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1946년]] 7월에 [[국공내전]]이 다시 일어나고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패색이 짙어지면서 [[중화민국]]을 반공 기지로 삼으려던 미국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육군성과 해군성을 해체하긴 했지만 일본군 패잔병의 귀환 업무와 기록 보존 등의 이유로 구 일본군의 육군성과 해군성을 각각 제1복원성, 제2복원성[* 여기서 복원은 무언가를 회복한다는 의미의 復元이 아니라 전시 체제에 있던 군인을 평시 체제로 돌린다는 뜻의 復員이다.]으로 개칭해 유지하였다. 그리고 항복 후에도 일본 근해에 남겨진 해상봉쇄용 [[기뢰]] 등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군 해군의 소해(掃海)부대는 1만 명 규모의 인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 때문에 제2복원성(뒤의 후생성 제2복원국)의 경우엔 구군인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소해부대]]는 1948년 미국의 [[미합중국 해안경비대|해안경비대]]를 본따 [[해상보안청]]으로 설치되었고 [[밀무역]]이나 [[밀입국]] 등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중국]]이나 [[소련]], [[대만]], [[한국]]에서 귀환하는 구 일본군 인원과 [[히키아게샤]]의 수송도 맡았다. 수송 문제 등으로 구 해군의 함정 일부를 개조하여 유지하였다. 일본 해군의 군복을 그대로 입었는데 계급장은 떼냈고 부류 기뢰를 총으로 쏴 제거해야 했기 때문에 화기를 상비했다. 어쨌든 이런 일부 잔존 세력이 있긴 했지만 1947년까지 미국의 비군사화 의지는 강했다. 제1복원성과 제2복원성은 후생성 내의 제1복원국과 제2복원국으로 바뀌었다. 일본 재무장의 계획은 대중적 통념과 달리 이미 한국전쟁 전부터 정책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948년]] 미 육군장관 로얄은 반공의 방벽을 위해 일본의 경제적 자립을 주장하며 정책 수정을 예고했다. [[배상금]]을 줄이고 공직에서 구 일본제국의 관료나 군인들을 쫓아내는 일이 중단됐다. 레드 퍼지가 이뤄지고 노동정책은 보수적으로 바뀌었다. 1948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G2(정보참모부)의 책임자였던 윌로비 소장(Major General)[* 태평양 전쟁 개전부터 맥아더를 보좌해온 고급 참모로 바탄 갱의 좌장격 인물, 후일 맥아더가 파면되고 그도 주군을 따라(?) 군에서 전역했다.]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근무하던 구일본군 참모장교들에게 재군비 계획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으며 미 해군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구일본해군 대장 등에게 해군재건계획을 검토하도록 했다. [[1949년]] 10월에 국공내전이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됐다. [[1950년]] 1월에는 애치슨 라인이 선언되고 일본은 전략적으로 중요해졌고 한반도는 제외되었다. 당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동아시아의 상황에 굉장히 무지했고 소련과 동유럽만 생각했다.[* 근데 이건 소련도 마찬가지. 실제로 한국전쟁에 적극 참전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