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위대 (문단 편집) === 해외파병 === 자위대의 전신인 [[해상보안청]]의 소해부대를 포함하면 1950년 [[6.25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에 한국 연해에 소해 부대를 파견한 것이 최초이다. 이들은 특별소해대(特別掃海隊)라고 불렸으며 연합군의 요청에 따라 한반도 연해에 왔다. 1950년 9월 11일 [[미합중국 해군]] 7함대 사령관은 한반도 근해의 [[기뢰]] 제거를 지시했는데 [[유엔군사령부|UN군]] 소속 내에 소해부대는 소수였다. 10월 6일에 미 극동 해군사령관은 일본 소해정을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법적근거는 1945년 9월 2일에 공포된 연합국최고사령관 지령2호였다. 당시 지령에선 일본군 해군이 [[태평양 전쟁]] 동안 엄청나게 깔아놨던 기뢰를 [[대본영]] 하의 소해부대가 한반도와 일본 근처의 수역에서 제거하도록 했다. 다만 한반도가 전쟁 중인 걸 감안할 때 군사조직이 아닌 해상보안청의 소해부대가 군사적 성격의 임무를 맡는 게 옳냐는 문제가 제기됐다. 해상보안청법 25조는 비군사적 성격의 임무만을 맡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특별소해대는 [[일장기]]를 걸지 않고 [[국제신호기]](E타입으로)를 걸었다. [[일본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인 [[요시다 시게루]]의 승인을 얻어 10월 16일에 해상보안청은 소해대를 파견했다. [[지휘관]]은 일본군 해군 대령 출신이었던 타무라 큐조(田村久三) 항로개폐본부장이었으며 1소해대부터 5소해대까지로 구성됐다. 12월 15일까지 특별소해대는 46척의 소해정을 동원하여 27개의 기뢰를 제거했으며 원산 소해 작업에선 소해정 MS14호가 기뢰 제거 중 폭발하여 한 명이 실종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두고 당시 [[북한]]의 외무상이었던 [[박헌영]]은 1950년 10월에 성명을 내어 일본군이 참전했다고 비난했고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51년 4월에 [[왜관]]에서 발언하길 일본이 전쟁에 참전하면 총부리가 일본으로 향할 것이라고 했다. 특별소해대는 반일감정을 고려하여 최대한 상륙하지 않는 방침을 취했으나 [[원산시]]에 가끔 상륙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군]]에 종사했던 [[병(군인)|병]]이나 [[부사관]], [[장교]] 대부분이 [[일본 제국|일제]] 치하를 겪었기 때문에 이들은 금세 특별소해대원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한국군인들과 한잔한 겁 없는 [[일본인]]도 있었다고 한다. 의외의 일이지만 [[재일 한국인]]들이 전쟁 당시에 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의용병을 모집할 때 재일 한국인이 647명 지원해 641명이 파병됐는데 일본인 150명 정도도 지원을 했다고 한다. 다만 대일감정 때문에 일본인들을 한국군 지원에 보내는 일은 없었다. 지원한 일본인들은 한일혼혈로 추정된다. 별도로 일본인 민간인 수천 명이 연합국에 의해 하역노동자로 한국의 주요 항구에 와서 일했다. 사실상 일본 정부가 NO라고 할 순 없어서 징용명령이었다. 1950년 11월 15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예인선 LT636호가 침몰해 일본인 선원 22명이 사망하기도 하는 등 1950년에만 일본인 56명이 6.25 전쟁으로 사망했다. 그 후 자위대로 재편된 뒤에는 해외에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에 특수부대를 파견했다는 주장([[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094534|#]], [[https://m.dcinside.com/board/war/1603279?recommend=1|#2]], [[https://m.dcinside.com/board/war/1603937|#3]])이 심심지 않게 나오나 확인된 바는 없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상황이 달라진다.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긴밀해지면서 일본은 환태평양에서 벌어진 미 해군 작전에 동참하게 된다. [[버블]] 등의 호황과 더불어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커지면서 자위대는 헌법 9조의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식으로 해외 파병을 정당화하게 된다. 1991년에 [[걸프전]]이 일어나자 [[6.25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해상자위대]] 소속의 소해대가 [[페르시아 만]]에 파견된다. 일본에선 '''파병'''이란 말을 쓰지 않으며 '''파견'''이란 말을 사용한다. 주로 병참이나 소해임무와 관련되며 전투병력이 파병된 일은 없다. 1991년 6월부터 9월에 걸쳐 기뢰 소해 임무를 맡은 뒤 해상자위대는 철수했다. 그 후 [[피스키퍼]] 활동으로 참여하게 된다. 최근엔 [[필리핀]]에서 태풍이 발생하자 구호를 이유로 자위대를 파병했고 2013년 12월에 철수했다. [[남수단]]에도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가있다. [[남수단 재건지원단]]에 탄약을 지원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2014년 1월 기준으로 현재 해외에 파병된 자위대는 [[남수단]]과 [[소말리아]] 근처의 해역에 있다. (자세한 내용은 [[http://ja.wikipedia.org/wiki/%E8%87%AA%E8%A1%9B%E9%9A%8A%E6%B5%B7%E5%A4%96%E6%B4%BE%E9%81%A3|일본어 위키백과]] 참조.) 정말 의외지만 육상자위대의 화학무기담당관이 수시로 [[중국]]에 파견되기도 한다. [[부대]]가 가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 가운데 화학무기를 처리하는 일로 가는 것이니 파병이라 보긴 어렵고 속죄(?)라고 봐야 할 듯. [[파일:external/pds.exblog.jp/d0067884_20405317.jpg]] 이라크에 있던 [[한국군]]과 [[자위대]] 장병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파병됐던 자위대원 중 25명(16명은 현역으로 자살) 정도가 자살했는데 [[방위성]]은 [[PTSD]]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교전을 겪진 않았지만 기지로 로켓 공격을 받았다. [[음모론]] 중에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갔던 자위관들이 자살이 아니라 실은 교전 중 전사했다는 설이 있다. 자위대의 파병 당시에 이라크 무장단체는 자위대의 철수를 요구하며 2004년에 [[일본인]] [[코다 쇼세이 이라크 피살 사건|코다 쇼세이를 살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