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오헝티 (문단 편집) === 탕성즈의 집권과 몰락 === 한편 호남성에서는 국민당의 세력이 강화되고 있었는데 1925년 5월 25일부터 6월 1일까지 국민당 호남성당부 1차 전성대표대회가 열려 국민당 호남성지부가 설립되었고 [[5.30 사건]] 이전까지 2700명 규모의 당원이 확보되어 8월에 21개 현에 당부가 설립되고 당원수는 5천명을 돌파했다. 이 시기 담조전쟁 중에 바오딩 군관학교 출신 군관들을 규합하여 자오헝티를 지원했던 [[탕성즈]]가 두각을 보였다. 담조전쟁 이후 탕성즈는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정규 4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계양, 영흥 등 상남 지방을 장악하여 지역 소군벌들을 흡수,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자오헝티의 측근 정치와 군사개혁에 불만을 품은 탕성즈는 국민당에 복종하는 [[계계군벌]]의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과 합작하여 국민당에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계계군벌은 탕성즈에게 자오헝티를 대신하라고 부추겼다. 여기에 국민당 호남성집행위원회가 탕성즈에게 합작을 촉구하였고 이에 탕성즈는 연합전선 참가를 타진하고 국민당이 송금한 군비를 받았다. 5,30 사건 이후 호남에서 북벌, 반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학생, 노동운동을 탄압한 자오헝티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1926년 3월 9일, 국민당 호남성 당부는 3만명 규모의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자오헝티 타도를 요구했다. 탕성즈가 노골적으로 병력을 집결시키며 장사 진격을 준비하자 자오헝티는 3월 11일 탕성즈에게 호남성장과 내무부장 자리를 대행시키고 장사를 떠나 거의 6년 만에 호남성의 지배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어려운 시국을 맞아, 군사, 치안, 재정 문제에 아무러 대책을 내지 못하고 물러날 것을 결심하였으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호남이 성헌을 제정한 것은 원래 국내의 분규를 해결하고 지킬만한 법을 만들고자한데 있었으며 이에 근거해 본인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금년 6,7월 개선 기일이 가까워짐에 인민들이 그동안 감정에 치우쳐 선거에서 연임하는 상황을 염려하니 수락한다면 인민들에게 고통을 증대시키는 일이 될 것이고,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또한 헌법을 어기는 일이 될 것이므로 개선이 임박하여 사직을 앞당기는 것이다. 둘째, 외부에 연치가 사익을 위한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본인이 일찍 사퇴함으로써 국내 인민들에게 연치법도가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함께 이 길을 쫓으면 국가는 화평통일을 이룰 수 있음을 명백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본인이 떠난 후 헌법규정에 의거해서 제4사단장 탕성즈를 내무부장으로 임명하고 성장의 직권을 대행하도록 한다. 탕성즈가 상남에서 거둔 업적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는 바이고 호헌애민하고 일을 처리함에 주도면밀하니 취임 후 정치가 궤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탕성즈가 호남성헌법 53조에 따라 3월 26일 성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우페이푸로부터 토역연군상군총사령관에 임명된 예카이신이 탕성즈를 공격하게 되면서 호남내전이 벌어졌다. 5월 초, 예카이신은 창사를 점령하고 자오헝티 복직 운동을 벌였으나 이미 정권 탈환의 뜻을 단념한 자오헝티는 예카이신의 복직 요청에 응하지 않고 [[봉천군벌]]의 수령 [[장쭤린]]에게 몸을 의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