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오헝티 (문단 편집) === 호남을 장악하다 === 1919년 6월, [[청첸]]이 북양군벌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받고 실각하면서 자오헝티는 청첸의 병력을 흡수했다. 1919년 7월 탄옌카이가 상군총사령 겸 호남독군에 취임하면서 호남에서는 수탈을 일삼는 장징야오 타도 운동이 벌어졌다. 1920년 [[우페이푸]]가 [[쉬수정]], [[취퉁펑]]의 변방군 견제를 위해 북상하기 시작하면서 호남군벌들은 이를 틈타 장징야오 정권을 붕괴시키고 호남에서 장징야오를 완전히 축출시켰다. 강력한 군공을 세운 자오헝티의 위세는 크게 상승했다. 이를 경계한 탄옌카이는 각 여장 및 각 구역의 책임자들을 자신의 심복으로 임명하여 자오헝티를 견제하려고 했고 자오헝티는 단장급 군장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포섭작업을 하면서 맞섰다. 이때 [[탕성즈]], 예카이신 등이 자오헝티의 심복이 되었고 자오헝티는 상군의 최대 실력자가 되었다. 1920년 11월, 청첸계 장령들이 봉기한 평강정변이 일어나 탄옌카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오헝티는 지지를 촉구하는 탄옌카이의 요구를 묵살하며 중립을 취했다. 결국 11월 23일 탄옌카이가 하야하자 자오헝티는 상군총사령관 직을 계승했다. 청첸계 장령들은 탄옌카이를 몰아낸 여세를 몰아 자오헝티까지 몰아내려 했으나 자오헝티는 탄옌카이 계파와 합세하여 12월 24일 청첸계 장령 8명을 처형하여 청첸계를 완전히 숙청했다. 이후 탄옌카이 세력들은 모두 자오헝티에게 복속되어 공식적이며 실질적인 호남의 최고통수권자가 되었다. 자오헝티는 군사개혁을 실시하여 1여단과 3여단을 각각 1사단과 2사단으로 확대개편하고 2단, 4단은 1혼성여단으로 병합하였으며 각 병단을 2혼성여단으로 통합했다. 하지만 탄옌카이의 잔여 세력이 각 지방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안심할 수는 없었으며 자오헝티가 호남성을 장악하였을 때 호남성에서는 연성자치론과 평화통일론이 동시에 주장되고 있었다. 자오헝티의 권력기반은 연성자치론자들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자치를 선포했다간 다른 군벌들의 어그로가 끌려 다구리 맞기 딱 좋은 판이었으므로 자오헝티는 이를 절충하여 성헌제정, 재정사무의 군민분치, 서남연합파 군벌과의 연합전선 결성이라는 방면으로 나아갔다. 자오헝티는 호남제헌주비처를 설립하여 연성자치론을 주장했으나 연성자치론의 급진화를 차단하고 자신이 연성자치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1921년 4월 호남성헌초안이 완성되면서 자오헝티는 호남성 의회에서 호남독군에 선출되었고 11월 호남성장이 되었다. 1922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호남성 헌법이 공포되었다. 또한 군민분치의 명분에 따라 행정사무를 성장이 맡을 것이며 군인이 이에 간섭하며 또다시 정변을 일으게 하지 말 것을 각 사령들에게 통전했다. 이를 위해 1921년 1월 군관들의 추천을 요구하는 의무규정을 삭제하는 등 군인들의 정치적 권력을 축소했다. 또한 1921년 3월 재정선언을 발표, 군인들의 수탈과 징수사무에 대한 간섭을 막고 재정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또한 사천의 [[류샹]]과 광동의 [[천중밍]]과 연합하여 소요에 공동대처하자는 군사동맹을 수립했다. 그리고 [[쑨원]]이 1921년 봄 비상대총통에 취임하자 기존 군정부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버리고 명백히 반대했는데 이는 쑨원의 북벌을 반대하는 천중밍과의 연계 때문이었다. 또한 호북독군 [[왕잔위안]] 축출을 위한 호북자치운동을 원조하기 위해 1921년 7월 20일 호북자치전쟁에 참전하여 성외 진출을 주장하는 군부의 욕구를 해소하고 호남성을 단합하고자 했다. 그리고 8월 11일 한커우 등지에서 성자치와 연성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소집을 주장하는 전문을 전국에 통전했다. 하지만 호북자치전쟁에서 호남군은 [[우페이푸]]에게 패배하여 자오헝티의 영향력은 도리어 축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