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오쯔양 (문단 편집) === 실각 이후 === [[파일:zhaoziyang2.png]] 은둔생활시 골프장에서 홍콩 기자들에게 촬영된 자오쯔양 실각후 감옥에 가지는 않았지만, 감시를 받으며 강요된 은둔생활을 했다. 이런 감시 상태에서, 언론 기관과 접촉하거나 공개 석상에 나오는 것은 금지되었고, 감시원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삶 자체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자오쯔양의 가택연금은 법적으로 내려진 공식처벌이 아니라 원로들의 결정에 따라 당에서 해임된 것이며, 이는 실제로 사법기관에서 법적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오쯔양은 고위직에서는 해임되었지만, 출당되지 않아서 당원 자격도 유지되었고, 전직 총리로서 받는 연금도 그대로 나왔으며, 전직 고위 관료들이 사는 고급주택이나 운전사 및 관용차도 배정되었다. 총서기시절에도 골프를 좋아해서 1980년대 최초로 중국에서 골프장 건설 허가를 내주었고 실각후에는 친구나 지인과도 만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뒤늦게 배운 골프로 소일했다고 한다. 실제로 골프광이었으며, 공산국가인 중국에서는 부르주아 스포츠로 찍혀 정치인이 공개장소에서 치는 것이 금기시되는 골프 사진이 여러장 남아있다. [* 심지어는 그가 실각할 때도, 그의 과오로 [[후야오방]] 장례식에 갔다가 바로 골프장으로 간 것도 거론되었다.] 다만 자오쯔양의 가택연금 중에서 있었던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긴 하다. 1990년 10월, 자오쯔양이 오랜만에 골프를 치기 위해서 외출을 하려 하자 중앙판공청 경호국은 외출 허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이를 막으려 했다. 자오쯔양은 자신이 외출할 수 없는 근거를 가져오라고 항의했고, 경호국이 막무가내로 그의 차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자 그럼 버스를 타고 골프장에 가겠다고 정면으로 맞섰다. 당황한 경호국은 장쩌민과 리펑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으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외출 중이라서 차오스에게 문의하였다. 차오스도 당황하여 경호국이 알아서 하라고 책임을 떠넘겼고, 경호국은 자오쯔양이 차를 타고 나가는 것은 허용했지만 대신 경호국 차량이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자오쯔양은 중일 합작으로 세워진 창평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골프장에서 일본 인사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는데, 덕분에 이것이 세상에 알려져 즉시 홍콩 기자들이 달려와 그가 골프를 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 방영하였다. 청두에 출장을 나갔던 장쩌민과 리펑은 분노하였고, 경호국을 크게 비판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에서는 심사기간에는 외출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구실로 자오쯔양의 외출을 막았다. 하지만 대외적으론 그가 자유라고 주장했다. 심사가 끝난 이후 요양을 위해 자신이 오랫동안 일했던 광동성에 가려 했으나 중국공산당은 홍콩 [[총독]]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이 홍콩의 민주화를 확대하고 있는 상황에 광동성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막고 대신에 광서성에 보냈다. 광서성에서 돌아온 이후 자오쯔양은 다시 골프를 치러 나가려 했지만 경호국에서 금지했다. 분노한 자오쯔양은 성명을 발표하고 규정에 없는 이런 핍박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자오쯔양은 그외에 서성구 문건가 1번지의 노간부 전용 양펑자다오 당구클럽에 가는 것도 즐겼으나 이것도 금지되었다, 자오쯔양이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또 맞서자 경호국은 1주일에 2번만 가는 것을 허용했으나 자오쯔양이 가기 전에 당구장을 모두 비워버려 그가 어떤 간부와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천윈, 덩샤오핑, 펑전 등이 죽었을때 자오쯔양이 조문을 가려 했지만 이는 모두 성사되지 못했다. 이러한 소동이 있은 후에 중앙판공청은 6가지 규정을 자오쯔양의 생활 규칙을 내렸는데 이중에서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손님을 접객하는 것은 되나, 기자와 외국인은 만날 수 없다. * 2. 외출 시에는 경호국에서 파견한 수행원이 동행한다. 교외공원은 산책할 수 있으나 번화가는 경호원이 제지할 수 있다. * 3. 베이징 인근 골프장은 외자, 합영 골프장이니 가까운 시일 내에서는 이곳에선 치지 말고 순이에 있는 농민 골프장에서 쳐라. * 4. 타지에 간다면 내륙의 성은 좋으나 연해, 민감한 지역은 곤란하다. 구체적인 계획은 중앙의 허락을 미리 받아라.[* 사실상 자오쯔양의 정치적 배경인 광동에 못가게 하는 것이었다. 정작 산동성, 절강성 방문은 허락됐으나 복건성, 해남도 등 광동성 인근 지역은 거절되었다.] 또 당직은 박탈되고 대권의 길은 막혔지만, 공산당에서 추방되지 않고 [[당원]] 자격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니까 당 차원에서는 "그가 과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딱히 사법적인 책임을 질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천안문 사태 당시 그의 행적을 보면 자기 권한으로 최대한 진압군을 지연시켰고[* 이 때문에 "국내사건의 군개입에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중앙군사위원회]]보다는 총리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친지웨이]] 국방장관이 사태 이후 연임하지 못하고 단임으로 끝났다.], 위로부터 내려진 진압 결정을 듣고 시위현장에 나타나 "곧 진압군이 나타날테니 어서 빨리 집으로 가세요"라고 말했을 뿐이었으니 위법을 저지르거나 무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덩샤오핑 입장에서는 자기가 대권을 물려주려 했던 심복이 자기의 뜻을 거스르고 시위대에 더 동정적이었다는 것에 실망과 함께 괘씸죄를 느꼈던 듯 하다. 하지만 천윈의 반격으로 개혁개방이 후퇴하면서 덩샤오핑은 자오쯔양과 함께 개혁개방파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장쩌민은 보수파에 호응하여 정치적 통제와 사상 재교육을 강화하였고 유학생들의 재출국, 자영업자의 입당 등이 금지되는 등 중국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이에 덩샤오핑은 후치리, 옌밍푸, 루이싱원 등 숙청당한 개혁개방파들을 복권하면서 자오쯔양에게도 2차례 천안문 사태에서 정부의 진압을 옹호하고 기존 입장에 대해서 공개 자아비판한다면 총서기 자리를 다시 줄 수도 있다고 협상을 제의했지만 자오쯔양은 천안문 사건에 대한 덩샤오핑의 동란이란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덩샤오핑이 천윈이나 다른 보수파 원로들을 다 찍어누르고 자신을 복권시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거절함으로 자오쯔양의 정계 복귀 기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가택 연금 기간 동안 회고록을 구술했고, 삼엄한 감시하에 살고 있었으나,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손자의 장난감에 테이프를 숨겨 국외로 반출, [[흐루쇼프]]처럼 국외에서 회고록을 출판하였다. 한국에서도 <국가의 죄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연금 상태 중인 2005년 1월 17일, 북경의 한 병원에서 호흡기 및 심혈관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없는 사람 취급은 아니라서 신화통신은 "자오쯔양 동지는 오랫동안 호흡기 계통과 심혈관 계통의 다양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차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최근 병세가 악화되어 긴급 치료를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어, 1월 17일 베이징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85세다."라고 짤막한 부고를 발표했다. 이후 오랫동안 장의 절차와 장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부부의 유골이 모두 집에서 보관되다가 마침내 2019년 10월에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 의식을 거쳐 묘지에 안장됐다.[[https://www.yna.co.kr/view/AKR20191018162600083?section=international/all|#]] 2021년 4월에 유족들은 베이징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2307336?sid=10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