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오쯔양 (문단 편집) === [[천안문 항쟁|천안문 사태]] === [[파일:external/imgs.ntdtv.com/p6384002a229564480.jpg|width=500]]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때의 모습.''' 그리고 옆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훗날 총리가 되는 [[원자바오]]. 천안문 광장에서의 민중 집회가 장기화되고, 당국과 학생시위대간의 대화가 무산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군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을 결정한다.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직접 [[천안문 광장]]에 나가 군중들과 만나는 모습이다. 당시 자오쯔양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 중이었는데, 천안문 상황을 전해듣고는 급거 귀국했던 것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울고 있다'''. 지금 와서 보면 안타까울 따름. 훗날 나온 그의 회고록을 읽어본 한 독자의 의견에 따르면, 자오쯔양은 당시 시위대의 주장에 완전히 동조했다기보다는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정심이 더 컸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http://kinocine.tistory.com/2027|#]] 공산당 노선을 전면 부정하진 않지만, 시위대에 대해 폭력적으로 진압하기보다는 본인 권력 인생을 걸고 시위대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을 우선시하려 했다. 이 점은 당시 시위대 앞에서 한 연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 학생 여러분, 우리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학생 여러분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꾸짖고 비판하는 것은 모두 당연한 일입니다. .. 여러분이 단식한지 벌써 7일째이며 더 이상 지속해나갈 수 없습니다...단식을 조속히 끝내...저도 여러분이 제기한 요구에 대해 당과 정부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길 원해서 단식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답을 얻으려면 대화 채널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허나 당시 그의 행보는 당 지도부에게 [[덩샤오핑]]의 무력 진압 지시와 상충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한때 덩의 유력한 후계자로도 거론되었던 그는 끝내 덩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5월 27일,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후임 총서기로 결정하였다. 천안문을 탱크로 깔아뭉갠 후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정치국 확대회의가 개최되었다.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자오쯔양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지만 후야오방과 달리 자오쯔양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맹렬하게 맞서 싸웠다. 덩샤오핑은 당규를 무시하고 정치국 위원 뿐만 아니라 참석한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며 자오쯔양 해임 안건을 상정했다. 당연히 자오쯔양 사임에 몰표가 던져졌지만 자오쯔양은 자신을 해임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그런 비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표를 행사했다. 덩샤오핑과 회의 주재자인 리펑은 이를 무시했다. 1989년 6월 23일부터 6월 24일까지 중국공산당 13기 4중전회가 개최되었고, 자오쯔양은 총서기에서 확실하게 해임되었으며 정치국은 물론 당중앙위원회에서도 방출되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반당 반사회주의 동란 중에 자오쯔양 동지가 범한 오류에 대한 보고'가 심의 통과되어 자오쯔양을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킨 중대한 오류를 범하였다고 격렬히 비판하고 "중앙의 업무를 주관한 이후, 4항 기본원칙의 견지와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에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당 건설과 정신문명 건설, 사상, 정치 공작을 홀시하여 당 사업에 엄중한 손실을 초래했다."라고 조리돌렸으며 가택연금 하에서 조사를 받을 것을 결정했다. 자오쯔양에겐 소조회의에 출석하여 최후변론을 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역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참석자들은 그를 죽어도 회개하지 않으며, 완고하여 바뀌지 않는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더욱 비판하였다. 1992년 인민출판사는 중공중앙문헌연구실에서 편집한 '13대이래중요문헌선편(중)' 권을 출판하여 자오쯔양을 반동을 규정한 13기 4중전회 공보를 공식출판함으로 그를 한번 더 부관참시했다. 이후 자오쯔양은 1992년 10월까지 민주화 운동에 개입하여 기밀을 외부에 누설하였는지, 그리고 왜 덩샤오핑에게 개겼는지 2가지 혐의를 조사받았다. 하지만 조사결과는 대외적으로 공표되지 않았으며 자오쯔양의 당적이 박탈되지도 않는 등 후속 처벌도 없었다. 다만 전해지는 바로는 자오쯔양은 30개 혐의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투옥되거나 혁명화당하는 비참한 운명은 면할 수 있었다. 그가 후속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2가지 였는데 첫째는 그의 처벌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과 당의 노선에 거스른 것에 대한 '정치적 단죄'에 해당했으며, 둘째는 뒤에서 언급되지만 장쩌민과 천윈이 보수파 노선을 강화하자 덩샤오핑이 후치리 등 개혁개방파들을 복권하면서 자오쯔양의 복권 카드를 들고나와 장쩌민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에겐 자오쯔양의 정치적 명예를 완전히 말살해선 안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