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오쯔양 (문단 편집)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 1945년 [[일본군]]이 항복하고 곧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자오쯔양은 공산군이 점령한 해방구에서 토지 개혁 담당을 맡아 공산당이 농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자오쯔양의 상관인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토지 개혁 전문가"로 공개적으로 칭찬할 정도였고, 덩샤오핑 사단의 핵심 인물이 된다. 공산당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자오쯔양은 군직을 나와 [[광둥성]]에 배치, [[예젠잉]] 밑에서 화남국 비서장 및 농촌공작부장, 부서기, 토지개혁위원회 부주임을 맡아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며 1955년 화남분국이 폐지되자 광둥성 당위원회 서기처 서기에 임명된다. 1959년 [[대약진운동]] 시기에 숨겨진 재산 찾아내기 운동 등을 벌여 [[농민]]들이 숨겨놓은 식량과 재산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탈하여 정부에 조달했는데, 결과적으로 광동성에서 수백만의 인명을 아사시키는 참극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사태에 책임을 통감한 자오쯔양은 좀 더 실용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어쨌거나 1960년, 상무서기로 승진, 광둥성 제1서기인 타오주와 함께 온건정책을 지지하였다. 1961년 2월, 광둥성 2기 당대회에서 당중앙에서 제시된 농업 60조, 공업 70조에 찬성하면서 농업과 경공업 발전을 주장했다. 1962년, 광둥성 제2서기 겸 비서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64년 광둥성 군구 정치위원, 당중앙 중남국 서기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65년 4월, 타오주가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되면서 상경하게 되자 자오쯔양은 일약 46세의 나이로 [[광둥성]] 제1서기로 승진했다.[* 한국 공무원으로 치면 '''40대 중반에 차관급 직책'''을 맡은 것이다. 그렇지만, 광둥성이 [[푸젠성]]과 더불어 중국 경제성장의 핵심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지사]]급 자리를 맡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고속승진의 끝판왕이다.] 당시 그는 중국에서 가장 젊은 당서기였다. 당서기 재임 시절 기술개혁을 주장하면서 생산성 향상에 노력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실용적 스탠스로 인해 주자파로 지목되어 모든 공직에서 해임당했고, 1967년 10월 16일, 8만명의 군중 앞에서 처참하게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후 내몽골 57간부학교로 하방되어 고생하다가 1971년 4월에 감호조치에서 해제되어 내몽골자치구 서기 겸 내몽골자치구 혁명위원회 부주임에 임명되었다. [[9.13 사건]] 이후 극좌파들의 힘이 위축되면서 1972년 1월, 광둥성 서기 겸 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돌아오게 된다. 1973년 덩샤오핑 이후 10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1974년 4월, 광둥성 1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겸 광저우군구 정치위원이 되었다. 광저우 군구 사령원 [[쉬스유]]와 함께 린뱌오의 잔여세력 공격에 참여하였고 1975년 11월, 덩샤오핑의 추천으로 쓰촨성 제1서기 겸 혁명위원회 주임에 임명된다. 1976년 1월에는 청두군구 제1정치위원을 겸하였다. 제1서기 재임 시절 사천성의 농업 개혁에 착수했다. 이때 발표된 것이 사천성 12조다. 그가 당 서기로 부임한 이후 [[사천성]]은 풍년이 들어서 "밥을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아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이어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79년 자오쯔양의 후견인인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실각시키고 대권을 장악하자, 자오쯔양은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1979년에는 [[대약진운동]] 기간에 중국이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추산하기 위한 조사 사업을 실시했는데, 이때 나온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해당 조사의 결과는 은폐되었다.[* 당시 조사원으로 참여했고 이후 국무원 체제개혁연구소장을 역임하다가 천안문 사태 도중에 미국으로 망명한 천이쯔는 당시에 나온 숫자가 최소 4,300만, 최대 4,600만명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3,000만명 대를 일반적으로 잡고 있던 학계에선 지나치게 높은 숫자라고 무시되었으나 재스퍼 베커는 이 숫자가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으며 이후 프랑크 디쾨터가 지방 문서고를 바탕으로 해당 숫자가 맞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디쾨터는 장제스를 옹호하고 중공체제에 대단히 비판적인 학자임을 감안해야 한다.] 이후 [[후야오방]]은 공식 사망자를 1,800만명으로 발표하고 유고슬라비아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오프 더 레코드로 2,000만명 이상이 확실히 죽었다고 언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