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산어보 (문단 편집) == 특징 == || [youtube(YPn3kaYZBiw)] || || KBS 역사 스폐셜[br]조선시대, 최신식 어류 백과사전이 있었다 || * 19세기 초 당시 흑산도 연안에 서식했던 한국의 토종 어류와 갑각류, 조개류에 대한 정보를 명칭, 분포, 생태, 유용성을 망라해 가며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어족이나 자연사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을 참고한다. * 기존 문헌을 많이 참고하고 인용했다고는 하나 결코 문헌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고, 실제로 유배지의 바닷가에 살면서 [[물고기]]를 해부하거나 현지인들의 증언, 직접 관찰과 견문한 것을 토대로 하여 내용의 충실을 기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아귀(어류)|아귀]]가 물 속에서 낚싯대 모양의 촉수를 사용하여 먹이를 유인하는 것이나[* 이는 [[정약전]]이 기록한 것 외에도 다른 나라에서도 알려졌던 사실인 듯 하다. 아귀의 영문명이 anglerfish, 즉 낚시하는 물고기라고 붙은것도 이 때문이다.], 어류의 아가미 호흡과 아가미의 구조 등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 어류의 상세한 산란과정이나 일부 상어류의 태생(胎生)습성, 서식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어류의 형태적 기술(가령 영남산 [[청어]]는 척추골 수가 74마디이고 호남산 [[청어]]는 척추골 수가 53마디라는것) 등 해부를 해야 알 수 있는 내부적 특징도 기술하고 있으며 먹이 포획, 계절별 생물 분포와 같은 다양한 [[생태학]]적 특징이 기술되었다.[* [[참조기]]의 경우 흑산도 주변 해역에서의 출현 시기를 꼼꼼히 기록하였다.] * 수족들의 특징 중에는 '''맛'''을 기록한 것도 있다. 이 생선은 맛이 달고 기름지다, 이 조개는 향이 좋지만 쓴맛이 난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옛날의 [[한의학]] 서적에는 한약재도 모조리, 단 하나의 예외없이 '맛'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부자나 초오 같은 독성 약물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당시의 맛이라는 것은 단순히 식용으로서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원시적인 화학적 검사법으로서 구성 성분 및 기능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수족들을 어떻게 요리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수족들의 실용적인 쓰임새 또한 찾으려 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 자산어보에서 나오는 분류법은 오늘날의 과학적 분류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과학적이기는 하나, 당시는 구미 선진국들도 근대적 동식물 분류법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유럽에서도 체계적인 생물분류학은 [[칼 폰 린네]](1707 - 1778) 등에 의해 시작하였는데, 시기상으로는 자산어보가 저술된 시대와 비슷하다. *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영남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상백문고(相佰文庫) 등에 소장되어 있다. 다만 소장본들은 모두 필사본들이며, [[정약전]]이 직접 집필한 원본은 행방이 묘연하다. 그래서 자산어보가 완전히 실전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 어류 백과로서의 걸출함에 아쉽게도, 도록(圖錄)이 없는 이유는 [[정약전]]이 동생 [[정약용]]과 의논하다 '''"그림은 믿을 게 못되니 오히려 글로 자세히 서술하는 게 더 나을 듯"'''이라는 충고를 따랐기 때문.[* 이걸 알 수 있는 것이 중세 시대 혹은 이슬람 세계의 생물학 분류 서적이다. 당시 회화의 한계와 종교적 제약 때문에 설명과 그림이 전혀 다른 경우가 허다했고, 제책오류 등의 문제로 그림이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후세대, 혹은 동세대 사람들도 그 도서에 기록된 생물이 무엇인지 한참동안 키배를 떠야 했다. 테오프라스토스 등 과거의 박물학자들도 자신의 책에 그림을 넣는 것을 반대했다.] 도록까지 있었으면 세계 생물학사에 남을 저서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유배되어 형을 살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이나 당시 기술의 한계 등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원본이 전해지지 않고 필사본만 남은 것을 볼 때, 설명의 일부를 도록으로 대체했더라면 오히려 필사의 어려움 때문에 복제가 더 적게 이루어졌거나 혹은 필사본마다 다른 그림을 전해 실용성이 크게 떨어질 수 있었다. * 이를 다룬 [[소설 목민심서|'''소설''' 목민심서]]에서는 양식이 없는 산지기(가문의 산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의 손자가 [[정약전]] 사후 그림과 알 수 없는 문자가 그려진 자산어보를 예쁘다고 벽지로 써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가 [[정약용]]이 경악하는 내용이 있다. 결국 정약용과 조카들이 글씨들을 [[필사]]해서 자산어보를 보존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 어족들의 명칭을 한문으로만 표기했다는 한계가 있다. 당시의 한문으로 된 정식 명칭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현지 주민들이 직접 사용하는 이름도 한문으로만 표기하고 순우리말도 한문으로 [[음차]]해서 표기하였다. 이상한 건, 정약전이 평소 글을 쓰면서 [[한글]]을 완전히 무시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 정약전은 [[문순득]]의 [[표해록]]인 표해시말을 대필하면서 여송(필리핀), 유구(류큐)의 언어들의 발음을 한글로 직접 표기한 적이 있다. 한글 표기를 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는 불분명하나, 어보의 독자층을 문맹률이 높은 어부나 현지 주민 등으로 특정하지 않았음은 추정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