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자산어보(영화) (문단 편집) === 역사 탐구 === * 창대는 자산어보의 서문 및 본문에 등장하는 실존인물 장창대, 혹은 [[장덕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고, 극중 대부분의 모습은 제작진의 창작이다. * 극중에서 정조를 정조대왕, 영조를 영조대왕이라고 부른다. 이 둘을 종에서 조로 바꿔 추존한 것은 고종 때이므로 시기상 각각 정종과 영종으로 부르는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 일반 관객들에게 영조, 정조란 명칭이 더 친숙해서 바꾸지 않은 듯 보인다. * 정조가 정약전을 독대하는 장면은 전반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창작을 적절히 버무렸다. * 정조는 "가까이 보니 형이 아우보다 낫다."고 흡족해한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서 이와 비슷한 구절이 등장한다. 이때 연신(筵臣)이라는 표현은 [[경연]]하는 신하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원래는 정조가 제삼자에게 했을 말을 영화에서는 독대 자리에서 한 것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 정사년 가을에 나는 [[곡산]] 도호(谷山都護)가 되어 나갔으나, 공은 여전히 불우하니 상께서 특별히 생각하시어 공을 친정사관(親政史官)으로 6품에 올려 주시고, 다시 전조(銓曹)에 명하여 공을 조용(調用)하라 하시니, 공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하시고, 무오년 겨울에 공에게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게 하셨으니 공에 대한 총애가 옅지 않았다. >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60A_0150_020_0050_2000_007_XML|다산시문집 제15권, 선중씨의 묘지명]] * 정조는 정약전을 증광별시로 뽑았다고 언급한다. 별시(別試) 혹은 증광시(增廣試)란, 과거시험 중에서도 3년마다 치르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와 달리 국가의 경사 등이 생기면 추가로 치르는 비정기 시험이다. 다산시문집에서는 정약전이 경술년(1790) 여름에 [[순조]]의 탄생으로 치러진 중광별시에 합격했다고 전하는데, 이 해에 정약전이 급제한 것은 [[조선왕조실록]]과도 교차검증된다. * 독대 장면에서 정조는 정약전에게 "너희 집안이 서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 일로 관리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정조는 개혁 군주라는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규정하고 조선에 주자학적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 한 복고주의자에 가까우며, 그의 치세에서는 [[문체반정]]과 같이 반동적인 사상적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여, 정학인 주자학이 바로 서고 나면 그 밖의 이단적인 교설은 교화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판단하였다. 정조의 복잡한 인물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점에서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 있는 대사. * 정약전 형제를 탄핵하는 조정 대신으로 [[심환지]]가 등장한다. 극중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정약전 형제를 국문하는 관료 중 가장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는 인물인데다가 [[이영석(배우)|이영석]] 배우가 초상화 속 심환지의 모습과 매우 닮게 나와서 쉽게 특정할 수 있다. * 심환지는 정약종 형제를 심문하는 장면에서 [[영남 방언]]을 미묘하게 섞어 쓰는데, [[청송 심씨]]가 경상북도 [[청송군]]을 본관으로 두기는 하나 심환지는 한성부 태생이므로 정말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했을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심환지의 영남 방언 사용이 노론의 기반이 영남이라는 인식 하에 의도된 디테일인 경우[* 이준익 감독은 전작 [[황산벌(영화)|황산벌]]에서 방언의 사용을 통해 풍자성을 강화하는 기법을 활용했으므로, 단순한 삑사리가 아니라 정말 의도된 부분이라고 추론해도 무리는 아니다.], 이는 종래의 역사 연구 결과와 크게 상충한다. * 스탭롤에 따르면 [[이시수]], [[이병모]], [[서용보]]가 등장한다. 이들은 이름이 극중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으나, 모두 순조 초의 고관들이므로 심환지와 함께 등장한 관리들일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순조 초의 천주교 옥사에 관여했다. *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맡으며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중적으로는 정순왕후가 천주교 박해의 주동자로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천주교 박해 자체에는 동의했음에도 정약용을 처형하는 데에는 반대했다. * 정약종은 배교하지 않아 죽고 정약전과 정약용만 살아남게 된 것은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 순조실록 1년 2월 25일 순조 1년 2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02025_001|기사]]에 따르면, 영부사 이병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약전과 정약용이 천주교에 깊게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없어 사형을 면하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장면 뒤에 정약전이 강진, 정약용이 흑산도로 유배 가려던 것을 심환지의 경계로 유배지가 서로 바뀌는데, 문헌상 확인되지 않는 창작의 영역에 속한다. > (전략) 정약종(丁若鍾)은 국정(鞠庭)에서 엄중하게 추문(推問)하는 아래에서도 죽어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은 당초에 사학에 오염되고 미혹되어 빠져 들었을 때에 죄범(罪犯)을 논하였어도 애석할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사학을 버리고 정도(正道)에 돌아가겠다고 스스로 그의 입으로 발명(發明)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약종의 적발된 문서 가운데 사당(邪黨)의 서찰(書札)에, ‘너의 아우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었고, 정약종이 스스로 쓴 문적(文蹟) 가운데 또, ‘형제와 함께 서학(西學)을 익힐 수 없으니, 자기의 죄가 아님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여러 죄수들과 구별됨이 있으니, 차율(次律)을 시행하는 것이 관대한 은전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 스탭롤에 따르면 달시 파켓이 '그라몽 신부'라는 배역으로 출연했으나 최종 편집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라몽 신부(Jean-Baptiste-Joseph de Grammont, 1736-1812?)는 [[베이징]] 교구에서 관리국장(procurator)으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로,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집전한 인물이다. 등장이 불확실한 이승훈, 아예 스크린에서 볼 수 없던 '북경사람1' 및 '북경사람2'의 배역도 보이는데, 베이징을 공간적 배경으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이 촬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대신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천 명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못 죽이면 아무도 못 죽인 거나 마찬가지요."라며 전전긍긍해한다. 역시 정약용이 쓴 정약전의 묘비명에 거의 유사한 말이 등장한다. 그 말을 한 사람으로 기록된 것은 [[홍희운]]이라는 이인데, 이 사람의 이름은 스탭롤에 없다. * "조카사위 [[황사영]]은 아직 안 잡혔소?" 하고 골치아파하는 대사도 역사적 사실과 들어맞는다. 정약전 형제가 수사망에 올라 심문이 진행된 것은 순조 1년 초의 일인데, 그 뒤에도 황사영은 잡히지 않아 4월에는 전 함경 감사 [[이병정]]이 다른 사람을 황사영이랍시고 보고하는 사기극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04017_003|기사]]) 황사영은 같은 해 10월에 이르러서야 붙잡힌다. * 정약전 형제가 유배 과정에서 나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간다. 간혹 사극에서 유배형에 처해진 죄인이 소달구지 같은 수레에 실려가는 묘사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사형수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자산어보 쪽의 묘사가 더 사실에 가깝다. 유배되는 당사자가 관직자일 경우 압송관이 동행하지 않을 정도로 편한 길인 경우도 있었지만[*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9177|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 참조.] 작중에서는 그렇게까지 편한 귀양길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 유배 가는 정약전은 [[여지도서]]의 내용을 기억해 내며 흑산도의 제반 환경을 줄줄 떠올린다. 이때의 수치는 실제 [[http://db.history.go.kr/id/sa_037_0040_0270_0020|여지도서 내용]]을 그대로 따 왔다. * 흑산도를 다스리는 인물의 직책이 '별장'으로 언급된다. 관객들에게 두루 익숙할 원님, 사또, 현감 등의 직책 대신 별장이라는 직함으로 나온 이유는 이 당시 흑산도에 군진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흑산도는 군사기지로서 무관이 방비 책임을 맡고 다스렸는데, 흑산도처럼 외딴 섬에 위치한 군진 등을 담당하는 종9품 하급 군관의 명칭이 바로 별장(別將)이므로 매우 적절한 고증이다. 1665년(현종 6) 전 병조 좌랑 [[민시중]]이 흑산도를 비롯한 섬 네 곳에 군진을 설치하자고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601028_009|상소]]를 올리는데, 이미 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저런 상소를 올릴 이유가 없으니 흑산도에 군진이 생긴 것은 적어도 저 때 이후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영조 때 법전인 [[속대전]]에도 흑산도에 별장이 설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조 때 법전인 [[대전통편]]에서는 비록 직접 언급되지는 않으나 정조 시기의 실록 기사들에서는 흑산도가 전라우수영 소속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정약전이 유배 중이던 순조 시기에도 흑산도는 마찬가지로 별장이 다스렸다. * 세금 감면 혜택을 노리고 정약전을 자기 집에서 모시겠다는 흑산도 주민이 몇 명 나온다. 이렇게 죄인에게 주거지를 제공해 주고 관리를 책임지는 인물을 보수 주인(保授主人)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현지인들 입장에선 보수주인 노릇도 그다지 환영할 바가 못 되었다. 살 곳을 죄인에게 하나 할당한다는 것도 경제적 부담이지만, 혹여 죄인이 잘못되면 덤터기를 쓰기도 하니 득은 없고 실이 훨씬 많은 직책이었다. 그렇다고 유배자가 유리걸식하게 둘 수는 없으니 관에서는 어떻게든 누군가를 지정해 강제로 보수주인으로 삼아야 했기에 보수주인 입장에서는 유배자들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나마 작중 풍헌의 경우, 고을 내에서는 배운 인물이었기에 정약전과 같은 학자에게 호의적으로 대우해 준 것이 다행이다. * 소나무 수취의 폐단에 대해 정약전이 지은 [[송정사의]]는 자산어보와 의외의 인연이 있다. 송정사의의 원문은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고 알려졌으나, [[현산어보를 찾아서]]의 저자 이태원 씨가 자료조사 과정에서 전문을 찾아냈다. * 별장에게 밉보인 창대는 장 5대를 맞는다. 조선의 형법체계상 [[장형]]은 [[대명률]]에 입각해 60대-70대-80대-90대-100대의 다섯 등급으로 나뉘므로 5대 단위로 장을 때리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흑산도와 같은 벽지 섬마을에서까지 FM대로 형벌이 집행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 전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하기는 좀 뭣하다. 굳이 따지자면 장형보다 한 단계 아래이면서 가장 경미하게는 딱 10대만 맞을 수도 있는 [[태형]][* 이쪽은 10대-20대-30대-40대-50대의 다섯 등급 체계다.]을 5대 맞았다고 했다면 장형보다는 훨씬 그럴듯했을 것이다. * 정약용과 관련한 사건들의 시간 관계가 역사와 상당히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단순 착오가 아니라 극의 진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듯하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돌아온 시점과 [[목민심서]] 강진본의 초고가 다 쓰여진 시점은 모두 1818년으로, 정약전이 죽은 시점이 1816년이니 중후반부의 중요한 전개들은 창작에 해당한다. * 작중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작물은 쌀, [[고구마]], [[옥수수]] 세 종류인데, 이 중 쌀이 쌀 상인들에 대한 언급과 함께 매우 간접적으로만 지나가는 것을 빼면 실질적으로는 고구마와 옥수수만 다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물은 모두 외부에서 전래된 [[구황작물]]이다. 특히 옥수수가 등장하는 장면은 가거댁이 여성의 공헌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씨가 중요한 줄은 아는데 밭이 중요한 줄은 모른다"고 이야기하자 정약전이 깨달음을 얻는 부분으로, 이 말은 이질적인 사상과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중요하다는 해석과도 연결되어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옥의 티는 '고구마'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다. 고구마와 [[감자]]는 국내에 소개되어 들어올 무렵 둘 다 감저(甘藷)로 알려져 있었으며 고구마는 일본어 어휘가 음차된 표현이다. 따라서 가거댁이 '고구마 줄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 작중 정약전과 흑산도 사람들이 창대가 과거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안타까워하거나 놀리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원칙적으로 조선의 [[양천제]] 하에서 과거 시험은 양인이라면 전부 응시 가능한 시험이었으므로 양반뿐 아니라 중인, 상민도 볼 수 있었다. 단, 창대는 [[서얼]]이므로 [[이방원|태종]] 이래로 [[서얼금고법]]에 의해 서자(양인 첩실의 아들)와 얼자(천민 첩실의 아들)는 [[과거제도#s-4.3.1|문과]] 응시가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과거제도#s-4.3.2|무과]] 내지 [[과거제도#s-4.3.3|잡과]] 응시만이 가능하다.[*스포일러 그러나 영화에 나온 창대는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이는 애초에 창대의 존재 자체가 족보에 기록되지 않아, 족보에 창대를 서얼이 아닌 양인으로 써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대의 아버지인 장 진사에게 다른 아들이 없거나, 사망했거나, 후계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전제 하에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 문순득이 자신의 여로를 설명하면서 쓰는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다. 이걸 문순득이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 문순득이 종2품 가선대부임을 증명하는 공명첩을 자랑스레 꺼내 놓는 장면이 나온다. 문순득이 여송국 사람들의 표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1809년(순조 9), 그 일로 공명첩을 받은 것은 1835년(현종 원년)의 일이기에 이 시점에서 극중 문순득의 발언이 성립할 수는 없다. * 창대 어머니는 창대가 부엌일을 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조선 후기에도 남성들이 요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가 꽤 많기 때문에 이 시대 흑산도에서도 부엌일이 [[성 역할]] 고정관념을 의미하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한 예로 정약용도 정약전에게 편지를 써 개고기 요리법을 보내주는데, 그 조리법은 원래 [[박제가]]가 알려준 것이라고 편지에서 첨언했다. * 흑산도 별장이 정약전에게 청탁을 또다시 시도하는 장면에서, 정약전은 "신임 전라 우수사 윤기수 영감이 내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냈어."라고 천연덕스럽게 별장을 낚는다. 그런데 윤기수라는 사람이 전라 우수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 기록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실록을 통틀어 윤기수라는 이름의 인물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순조 시기 전라 우수사로 확인되는 인물만 두자리수이기 때문에 실존인물을 넣으려면 얼마든지 넣을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사이버 인명을 정성스럽게 넣어놓은 것은 정약전의 뻔뻔한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래서 사람이 문자를 배워야 한다~~ *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아이를 본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가거댁이 일반 백성처럼 묘사되는 것과 달리, 호장의 딸과 결혼했다고 하였으므로 혼인 상대가 되는 여성의 경제적 지위는 영화에서보다 높았을 것이다. * 정약용이 [[백련사]]에서 승려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실제로 정약용은 강진에서 불교 승려들과 자주 교류했으며, 차 문화에 대해 함께 논한 [[초의]]선사가 유명하다. 이때 정약용의 제자를 자처한 스님은 [[혜장]]으로, 유배 온 다산과 교분을 맺고 제자가 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1811년에 사망했다. * 정약용의 제자 중 앞서 흑산도에 방문해 창대를 상놈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창대를 상대로 시 짓기 대결을 벌였으나 망신을 당하는 이는 크레딧에서 배역명이 [[이강회]]로 기재되어 있다. 이강회는 실제 역사상에서도 정약용의 제자였던 실학자로, 정약전의 사망 후 우이도로 들어가 유고를 정리하고 저술 활동에 힘썼다. 영화에서 직접 표현되진 않았으나, 그도 창대와 정약전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정신적 성장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 창대와 이강회가 시 대결을 하며 지은 시는 정약용의 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60A_0050_010_0040_2000_002_XML|독소(獨笑, 혼자 웃다)]]이다. 천하다며 얕잡아 보던 창대가 엄청난 수준의 대구를 선보이자 이강회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데, 원본 시에서는 월만빈치운(月滿頻値雲)인 것을 '만월'빈치운(滿月頻値雲)으로 순서를 바꿔 잘못 말하고 만다(자막은 그대로 月滿으로 출력). * 극의 후반부에 정약전은 왕도 신하도 필요 없는 세계를 꿈꾸며 평등을 논하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역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불온한 발언에 창대는 정약전을 두고 떠나 버린다. 이 장면은 상당히 논쟁적인 장면으로, 정약전의 사상을 유추할 만한 연구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음에도 그가 이렇게나 파격적인 사상의 소유자였음은 증명하기 어렵다. 이준익 감독 인터뷰를 빌려 말한다면, 감독 스스로는 이 장면을 왜곡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장면이 과연 왜곡인지 날조인지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 나주 [[아전]]들이 각종 비리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아전에겐 녹봉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아전에겐 실제로 녹봉이 없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당연히 아전들 스스로 먹고살 궁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장부 조작이나 횡령 등 화이트칼라 범죄를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것이 습속이 되어 근절할 수 없었다. 더 윗선의 관료들도 박봉이긴 마찬가지라 지역 네트워크를 통한 비리 커넥션에 한번 코가 꿰이면 벗어나기 힘들었는데, 심지어 [[고상안]]의 [[효빈잡기]]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감사가 감영의 아전을 거느린다는 것만 알고 감영 아전이 감사를 거느리는 줄은 모른다."라는 구절도 나온다. 극중 등장하는 늙은 나주 목사의 경우 썩어빠진 전형적 탐관오리로 그려졌지만, 그보다 덜 부패했다고 해도 청백리 정신이 어지간히 투철하지 않은 지방관이라면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