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본론 (문단 편집) === 시초축적 === >"[[대항해시대|아메리카에서 금은의 발견]], 원주민의 섬멸·노예화·광산에 생매장, 동인도의 정복과 약탈의 개시, 아프리카가 상업적 흑인 수렵장으로 전환 따위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시대를 알리는 새벽의 특징이었다. ~ 그 뒤를 이어 일어난 것은 [[제국주의|지구를 무대로 하는 유럽 국가들의 무역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스페인에 대한 네덜란드의 반항]]으로 개시되었고, ~ 현재 아직도 중국에 대한 [[아편전쟁]] 따위로 계속되고 있다." - <자본론> I권 하편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자본론> I권 하편 자본주의적 생산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설명.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회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A)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B)로 나뉘어 있을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A와 B 사이에는 공식적인 신분 구분은 없으며, B는 과거 시대의 [[노예]]나 [[농노]]와 달리 전자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는다. 양측은 임금노동계약을 체결함으로써야 생산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어쩌다가 중세 농노제/봉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혹은 만인이 평등하다고 여겨지는 근대사회가 대두되는 과정에서 누구는 생산수단 소유자가 되고 누구는 임금노동자가 되는 차이가 생겨났을까? 근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경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조차도, 위의 질문을 그다지 고찰하지 않았다. 대체로 근면한 자들은 부를 쌓았고 게으른 자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식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에 따르면 '''근면이 부 축적에 유리하다는 보편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자본주의적인 자본가-노동자 구분이 등장한 것은 특정 시대에 집중된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서'''였다. [[중세]] 봉건제의 농노와 노예들은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영주로부터 해방되어 갔다. 즉, 이들은 자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됐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갖게 됐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동시에 해방된 농노/노예들이 생산수단을 상실하고 봉건제도로부터 제공받던 생존 보장을 상실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각지의 장원별로 농사를 짓던 봉건제에서는 장원에 속한 농노들이 농사에 쓸 도구들을 직접 소유하고 수확량의 상당부분을 영주에게 납부하기는 했어도 농노 본인의 몫도 챙길 수 있었다.[* 또 영주들도 이런저런 관습법 등 여러 요인으로 농노들을 함부로 수탈하기도 곤란했고(동유럽 제외) 또한 농노들이 근본적으로 농업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생산시간을 억지로 늘려도 생산물이 그만큼 늘지 않으므로 농노들도 쉴 시간이야 있었다. 물론 영주들이 이런저런 부업을 시키긴 했지만...] 반면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기업체들이 생산도구들을 대량으로 모아놓고 대량생산을 하게 되면서, 농노 개개인이 생산도구를 보유한 채로 자급자족적 생산을 한 뒤 잉여분을 내다파는 방식이 의미가 없어졌다. 물론 여기에는 산업구조 측면에서 공업의 비중이 농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져가는 경향도 동반되었다. 그리고 영주로부터 해방됨에 따라 독자적으로 경제적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무수한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도시로 가서 공장노동자가 돼야 했다. 이러한 도시로의 이동은 농민들이 더 이상 장원에 예속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