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호균 (문단 편집) ===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01210503_4.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sports/2009/baseball/expert_contents/pdh/ec_content/expert_220/1239589186_file_image_1.jpg|width=100%]]}}} || ||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 || 1983년 계약금 2천만원, 연봉 2천 4백만원의 당시로선 초특급 대우로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였고, 그 해 [[일본]]에서 건너온 [[장명부]]와 원투펀치를 이루며 활약했다. 12승 15패를 기록하였는데 비록 승수보다 패가 더 많긴 하지만, 당시 리그 최하위권인 삼미의 전력을 감안할 필요가 있으며 평균자책점도 3.03으로 호성적이고 무엇보다도 '''235이닝을 던졌다는걸'''[* 지금처럼 한팀이 페넌트레이스 144경기를 치르는 게 아니라 100경기를 치르던 시절에 235이닝을 던졌다는 건 144경기 체제 기준으로는 거의 350이닝에 해당할 정도니 혹사라 할만하다. 한편 장명부는 임호균의 2배에 가까운 400이닝.] 감안하면 엄청난 성적. 비록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년 전 승률 2할에도 못 미칠 정도로 형편 없는 꼴지 팀이었던 삼미를 83년도에 3위까지 올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인천 연고지 출신의 임호균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인품으로 삼미 투수들의 리더 노릇을 했다. 하지만 임호균의 보스 기질을 못마땅해 하던 [[장명부]]가 구단 고위층에 "임호균을 트레이드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구단은 장명부의 손을 들어 주며 임호균은 1983년 11월 [[우경하]], 박정후, [[김정수(1953)|김정수]], [[권두조]]를 상대로 한 1:4 트레이드[*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일대 다자간 트레이드였다.]로 [[롯데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자신의 트레이드 소식을 TV 뉴스로 알게 된 임호균은 격분하여 골프 연습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던 삼미의 [[김현철#s-6]] 구단주를 직접 찾아가 "내가 왜 트레이드 되어야 하느냐?" 하고 따졌는데, 정작 김현철 회장 또한 임호균의 트레이드 사실을 TV를 보고서야 깨달은 상황이었다. 체념한 임호균은 "어떤 선수가 삼미라는 팀을 진심으로 원하고 자랑스러워 했는지, 나중에 톡톡히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그리고 임호균은 자신의 말대로 삼미를 상대로 더 강한 투구를 보여주었으며 롯데에서 우승 반지도 얻은 것에 반해 삼미는 장명부의 태업과 혹사 후유증(30승을 달성하면 1억원을 주겠다는 삼미 사장의 말을 믿고 1983년에 30승을 기록했으며 구단에서 말을 바꾸자 의욕을 잃었다.)이 겹치는 등의 악재로 이듬해인 1984년에는 도로 꼴지로 추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