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페라토르 (문단 편집) ==== 직위와 칭호의 세습, 제정의 제도화 ==== 아우구스투스가 수여받은 직위들 중 임페리움 마이우스와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재산이었다. 즉, 로마 공화국의 상속법에 따라 그는 자신이 지정한 사람에게 이 전대미문의 막강한 권한을 상속해 줄 수 있었다.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대통령 직위 자체는 상속되는 것이 아니지만, 내각 구성권 및 내각 인사권과 국군통수권, 각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인사권, 그리고 국회의원과 법관에 대한 인사권과 국회 입법에 대한 거부권은 현직 대통령이 자기 후계자에게 상속해 줄 수 있으며, 이 권한을 상속받은 사람에게 국회가 대통령 직위를 사후승인 같은 느낌으로 부여하는 형식이었다. ~~이런 미친~~[* 공직을 재산으로 여겨 친족에게 상속시켜준다는 개념은 현대 민주공화국가 국민의 관점에서 보면 물론 미친것 같지만... 전근대에는 그다지 특이한 개념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에서도 관직을 돈을 주고 산 일종의 재산으로 여겨 자식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비일비재했고, 애초에 세습군주정 자체가 권력을 사유재산으로 여기는 논리를 기반으로 했던 것. 유럽의 공작, 후작, 백작 등의 작위도 그 유래가 로마 시대 관직에서 비롯되는 것들도 있다.] 다만 공화정 시기의 기억이 남아 있던 당대 로마인들에게 임페라토르는 여전히 개선장군만이 일시적으로 받을 수 있는 대단히 영예롭고 선망받는 호칭이었다. 이 호칭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위뿐만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전공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는데, 공화정 후기에는 사소한 공을 세운 지휘관들조차 개선식을 위해 휘하 병사들에게 자신을 임페라토르로 불러줄 것을 요구해[* 정치적 사정으로 이런 경우에도 개선식이 허용되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당연히 당대 로마인들도 이름뿐인 개선식과 '임페라토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빠르게 잊혀졌다.] 빈축을 샀다. 그러다 보니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 실적과 권위가 부족한 후계자에게 임페라토르 칭호를 물려주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은 당연했고 나아가 황제의 정통성까지 흔들리게 됨을 잘 알았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후대 황제들과는 달리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등 후계자 후보들을 최전선에 파견해 앞으로 받게 될 임페라토르 호칭에 어울리는 군공을 쌓도록 하고, 개선식을 치러주며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래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던 [[대 드루수스]]는 그의 판단, 계획대로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1세]] 같은 스타일의 병력운용, 능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는 낙마 사고로 현직 집정관 신분으로 약식 개선식 직전 요절했다. 티베리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밑에서 군사 참관 수업을 시작으로 경력을 쌓은,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만 20세도 안 된 나이에[* 가이우스의 후계자 등극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가 노망이 나 자기 핏줄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욕심에, 함량미달 철부지를 내세웠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후의 제위 후계자들은 가이우스 나이 때 로마에서 제왕수업을 받았지 노회한 정치인에게나 어울리는 막중한 임무를 받고 외지에 파견되지는 않았고, 나이에 비해 지나친 부담이었다는 점은 참작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핏줄들을 매우 아끼기는 했지만, 권력구도 문제에서는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판단을 일관되게 해온 아우구스투스가 유독 두 손자에게만 팔불출 할아버지처럼 굴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우구스투스가 두 후계자들을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미증유의 제위세습을 위해 급히 실적을 만들어야만 하던 사정이 있었다.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실패는 개인적 역량부족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시대상황으로 인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음도 분명하다.] 동방 시찰과 대 파르티아 외교 교섭이라는 나이에 비해 매우 무거운 임무를 맡았다가 실패하고 객사했고,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군복무를 위해 히스파니아로 가던 중 중간 기착지 마르세유에서 병사했다. 이중 가이우스 카이사르 사례는 비슷한 나이 대의 대 드루수스가 알페스 산맥 파견 근무 후 갈리아 전역을 관할한 총독 역을 맡김과 비슷했다. 그런데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이런 임무를 무리하게 맡긴 건, 아우구스투스의 높은 기대 때문이기도 했으나, 공화정기의 기억이 남아 있던 시기에 원로, 실력자와 영웅들에게 수여되던 관직과 명예로운 호칭[* 프린캡스 세나투스, 임페라토르, 폰티펙스 막시무스, 켄소르 등은 하나같이 공화정기 최고 명문가의 실력자들이 거쳐가거나 수여받은 관직과 명예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같은 지방유지도 군공만 있으면 가능했던 임페라토르를 빼면, 실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가문까지 따라줘야 이런 관직과 칭호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들로 정당화되던 황제 자리를 사상 최초로 세습하려면 이에 걸맞는 실적을 쌓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귀국을 거부하고 그곳에서 아르메니아 사건으로 입은 상처로 요절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양손자들로 누나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들인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후일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주목했다. 이는 엄연히 원로원, 로마 귀족적 전통상 친혈육 후광, 보호자로 있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술한 특성상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형제는 아직 군복무 경험이 없고, 이중 둘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그에게 큰 고민을 안겼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집권 뒤 꾸준히 쓴 《업적론》에서 '내 아들'이라고 계속 언급해온,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중간 다리로서 살아생전 이를 물려주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서기 12년 10월,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양자 입적 전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이 사람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이며, 12살때 이미 옥타비아누스의 '아들'로 로마 대중들에게 [[악티움 해전]] 승리 후 개선식에서 소개됐다.]의 이름으로 거행된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으로 화려하게 공개한다. 물론 이때도 그는 공화정의 전통과 자신의 정치적 기술을 교묘히 섞어 사용했다. 먼저 아우구스투스는 40년 넘게 개인이 단독으로 로마 통치권을 합법적으로 쥐고, 죽을 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그 통치권을 물려주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는 수십년동안 지속된 '''아주 자연스럽고 교묘한''' 작업이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인들은 자연스레 그와 그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카이사르 가문)의 승계를 겉으로는 반대하지 못했고, 이를 원로원조차 과반수 이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서기 41년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이 [[유피테르]] 신전에서 소집될 당시, 원로원 회의에서는 대부분 참석자들은 공화정 복귀를 원했다. 그렇지만 정작 회의 내내 공화정이 유지되고 있는데, 굳이 선언해야 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계속 나왔을 정도로 그 해석에 대해 논의가 계속 되었다. 또 "이 기회에 카이사르 가문 사람 내 남자 후계자에게 나라를 맡겨선 안 된다."라는 말이 나왔고 이 부분도 주제로 논쟁을 이어갔는데, 대략 결론은 "임페라토르는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그의 직계혈육들인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 올라야 된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도 부모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며, 율리우스 씨족이 클라우디우스 씨족이고 카이사르 가문이 네로 가문인건 자명하다. 클라우디우스도 카이사르 가문 소속 남성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으며, 이것이 우리의 현실 ."라는 식이었다.] 또 그는 [[숙청|정적 제거]] 수단으로 두 가지의 무기를 만들어내거나 지위를 이용해 활용했다. 그것이 바로 율리우스 간통법과 반역 처벌법인데, 반역죄 처벌법은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 '제1차 국가 조정' 조치 후 원로원에게 합법적으로 국가 원수로 인정받으면서 얻어낸 결과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기원전 2년 '파테르 파트리아이(조국의 아버지)'라는 거창한 칭호를 원로원에게 수여받아 로마 공화국의 재건자이자 공화정 회복의 수호자로 확고하게 올라섰다. 이렇게 모든 작업을 자연스레 마무리지은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5년 이래 제위계승계획을 순조롭게 꾸밀 수 있었다. 그는 76회 생일을 앞두고 완벽하게 본인이 가진 임페라토르라는 합법적 지위 등을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고스란히 물려줬다.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공화정 시대의 전통처럼 스스로 나이가 고령임을 들어 연회와 원로원 회의에 참가하지 않는 등 공적 업무에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본인의 두 혈육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를 위한 각종 영예와 특권을 합법적으로 자연스레 받아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는 임페라토르 직을 유지했으며, 군통수권과 호민관 특권 등도 내놓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혼란스러운 내전없이 14년 8월 19일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의 추인아래 '''로마 건국 이래 최초의 부자상속'''으로 권력을 쥐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티베리우스 이후에도 자신의 혈육과 가문이 그 다음 순위의 임페라토르라는 것도 얻어냈다. 제정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면서 황제 계승 후보자가 최전선에 나가야만 하는 관행도 [[클라우디우스]] 이후 브리타니아 정복처럼 휘하 장군들이 수행한 전쟁도 황제의 공으로 인정되어 자연스럽게 개선식을 치르게 되며 정리된다.[* 그래도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 앉아서 서류만 만지지 않고 직접 출정했음을 보이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잠깐이나마 브리타니아를 방문해야 했다.] 그러면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만이 불릴 수 있는 칭호에서, 자연스럽게 황제 가문이 세습하는 칭호로 바뀌게 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칭호와 권한의 세습을 통해 자신의 혈통이 제위를 이어나가기를 바란 아우구스투스의 바람과 달리 [[네로]]가 68년 원로원과 군대에게 불신임을 받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일가]]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이후 로마는 [[네 황제의 해]]라는 내전을 거쳐 69년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 아래에서 안정을 찾는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의 안정적이고 합법적인 지위 승계를 위해, 법을 통과시키면서 자신들과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한 카이사르라는 명칭을 현직 임페라토르가 아닌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에게 물려준다.[* 현직 임페라토르가 개인 성씨와 상관없이 제호로 취한 것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최초였다. 하지만 원로원조차 41년 당시 대놓고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율리우스 =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 네로인건 다 아는 사실이다”, “클라우디우스는 태생부터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며, 본래부터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다. 즉, 카이사르를 제호를 취했다고 해도 플라비우스 가문과 달리 쌩뚱맞은 타인이 택한 이름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클라우디우스가 카이사르를 택한 이유는 완벽한 정통성을 위해 취한 이름이었던 셈이다.] 그러면서 새로 개편한 원로원을 통해 자신의 가문을 [[플라비우스 왕조]]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습가문으로 공인받고, 임페라토르를 사용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적법한 마지막 통치자를 [[클라우디우스 1세]]와 그 외아들 [[브리타니쿠스]]로 정의내린다. 그리고 이때 클라우디우스 신전 등을 복구시키면서 임페라토르 직위의 정통후계자가 본인임을 천명한다. 이런 정치적 변화와 마찬가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이후부터 임페라토르 직위와 칭호사용도 변하게 된다. 먼저 제위에 오른(더 정확히 말하면 원로원 승인으로 인정된)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제호로 취하면서, 프라이노멘에 임페라토르를 붙였다. 이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이후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했는데, 사실 임페라토르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한 사람이 아우구스투스라서 오토가 생뚱맞게 만든 전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그들의 친혈육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굳이 자신들의 프라이노멘으로 임페라토르를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와 옛 공화정 전통대로 자신들이 임페라토르로 찬사받은 횟수를 IMP I(임페라토르로 1번 찬사받음), IMP II 등으로 표기했다. 또 로마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지중해 동쪽 세계에서 [[아우토크라토르]](αὐτοκράτωρ/Autokrator)로 차용해 사용했다. 이는 그리스인이기도 한 [[플루타르코스]] 등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라틴어 어감을 살려 사용한 탓에 독재자 이미지보다는 제국의 황제라는 뜻이 더 강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와 기원전 4세기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3세]] 등이 사용한 아우토크라토르와는 어휘상 의미에서 약간의 차이가 묘하게 있었다고 한다. 반면 제정 시대 이후,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제국의 [[동로마 제국|동쪽 절반]]에서는 황제를 그리스어로 "왕"을 뜻하는 [[바실레우스]]로 불렀다.[* [[로마법 대전]]에 수록된 그리스어 사료 중에 그리스인이 로마 황제에게 청원하자 황제가 비답을 내린 것이 있는데, 거기서도 청원인이 황제를 '바실레우스'로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바실레우스라는 말은 오직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만 사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어의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와 라틴어의 임페라토르(Imperator)는 동의어가 되었다.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아프토크라토라(αυτοκράτορα)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서 황제를 뜻하는 말로 쓰고 이는 전제정치를 뜻하는 영어 단어 autocracy의 어원이기도 하지만, 현대 그리스에서도 동로마(비잔티움) 황제를 칭할 때는 그대로 바실레우스(바실라스)를 칭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