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칙서 (문단 편집) == 평가 == 세계사 교과서만 대충 훑은 사람들한테는 망해가는 청나라 관리--당시 청나라 GDP가 영국의 5배였다는 점은 넘어가고--로 주제도 모르고 영국에 싸움을 걸어 아편전쟁의 발단을 만든 원흉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지만, 상술한 내용과 아편전쟁의 경과 과정을 읽어보면 청나라 후반 관리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다만 임칙서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청나라 관리들도 서양문물중 화기(대포)와 철선만큼은 도입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로 시작된 것이 [[양무운동]]이다. 물론 새로운 새로이 도입한 서양 문물을 제대로 운용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사회제도 정비와 사상적 이해 부족이 걸림돌이 되어 성공치는 못했다.] 실제로 그를 양무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만든 [[개화파]]의 시조로 평가하기도 한다. 아편을 척결해야 하는 명분은 분명했다. 아편중독을 방치하면 국가가 망조에 들 것이고 사회를 좀 먹게 하는데 청나라 후반에는 청나라 관료들이 부패하고 썩어서 뇌물만 준다면 관료들이 아편 퇴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 비해 [[임칙서]]처럼 강단있게 아편을 척결하는 것은 그 시대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제1차 아편전쟁]] 항목에도 있지만 이 전쟁은 영국이 명분없이 일으킨 전쟁으로 임칙서에게 잘못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그가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거나 또는 국제 정세에 해박하지 못해 전쟁 와중에 오판을 저질렀던 점은 지적할 수 있겠지만, 임칙서와 같은 충직한 관리들의 저항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아편이 창궐하여 더 일찍이 회생불가 수준으로 무너졌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태평천국 운동]] 같은 한족들의 반란이 성공하거나 일부 뜻있는 만주족[* 그 중에서도 특히 [[문자의 옥]]으로 몰락한 만주족의 후손, 보오이 차별이라는 만주족 사회의 현실에 분노한 보오이 등 청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지 않거나 아예 없는 만주족이 해당 대체역사의 역성혁명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이 주도하는 역성혁명이 일어나 청나라의 멸망이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 수도 있다. 다만 서양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서 영국의 [[철갑선]]은 크기가 크니 강을 타고 내륙으로 들어오지는 못할 테니 성을 끼고 버티면 된다는 오판을 했다. 기본적으로 대단히 강단이 높고 유능한 공무원 스타일이었는데, [[제1차 아편전쟁]] 당시의 기록만 읽어봐도 살인을 저지른 영국인들이 영국법 운운하며 살인범 인도를 거절하자 직접 들여와서 번역까지 끝마쳐놨던 영국 법전을 그 면전에다 들이대며 따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광저우에 부임하자마자 한 일이 영자 신문, 영국법, 국제법 등을 중국어로 번역해 놓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원칙주의자에 꼼꼼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비록 국제 정세의 큰 그림을 보는 눈은 다소 부족했을지라도 당시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에서 하던 내로남불 식의 침략행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아편전쟁의 서막이 되는 천비 해전에서는 국제적인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아편 뺏긴 영국 상선이 아편과 무관한 영국 상선을 포격하는 희대의 팀킬 짓을 자국 해군을 동원해 제지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국 해군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즉시 미국 상인과 접촉해 서양 대포 300문을 조달했다. 이 조치는 상당히 효과적[* 청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작정하고 대비했더라면, 영국군은 실제 역사와는 달리 이기더라도 고전을 면치 못하였을 가능성이 크다.]이어서 실제 아편전쟁 초기 광저우로 몰려왔던 영국군은 그가 설치해놓은 광저우 진지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함선 4척만을 견제용으로 남겨둔 채, 그대로 우회해서 톈진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을 정도다.[* 영국군이 톈진으로 우회하는 바람에 임칙서는 책임을 물어 파직 당하였다.] 비록 영국군이 국경 지대를 헤집고 다니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조치가 효과적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만약 이 인물이 파면되지 않고 계속 청나라의 고관직을 맡고 있었다면, 청나라의 미래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숙청을 당한 탓에 끝내 조국을 완전히 구해내지는 못한 점은 [[원나라]]의 [[토크토아]] 및 [[명나라]]의 [[원숭환]]과 비슷하고, 정치적 숙청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직 후 재기하여 공을 세운 점은 [[조선]]의 [[이순신]]과 비슷하다. 그의 유지를 계승한 인물이 이후 상군을 조직한 [[증국번]]과 북양대신 [[이홍장]], [[좌종당]]이다. 근대 일본의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임칙서를 두고 "신중하지 못한 자가 쓸데없이 아편을 태웠다가 전쟁을 자초하여 망신만 당했다."라는 식으로 조롱했는데, 사실 이건 후쿠자와 유키치 자체가 [[탈아입구]][*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뜻. 글자 그대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나라와 조선을 포함하여 모든 아시아 국가들을 혐오했던 인물이었다. 간혹 국내의 후쿠자와 유치키 옹호자들은 후쿠자와가 친한파인데 조선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일 때문에 탈아입구를 주창했다고 하지만, 후쿠자와는 갑신정변 이전에도 중국과 조선을 가리켜 더러운 거지와 천민이라고 공공연하게 멸시하였다.]를 주장할 만큼 극렬 [[혐중]]이라 그랬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상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 임칙서는 매우 선각자적인 인물로 수구적이라고 섣불리 비난당할 인물은 아니다. 게다가 아편 문제는 영국에서조차 "아편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부당하다"라는 의견이 대두되어 찬성과 반대가 비등비등한 사안이었으니 중국으로서는 충분히 반발할 사유가 된다. 더욱이 아이러니하게도 임칙서의 방대한 서구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쓰여진 해국도지가 일본의 막말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 중국이 광범위한 영토에 비해 부족한 치안인력 및 범죄조직과 당 고위 간부와의 커넥션 등으로 그 실질적인 효과에 대해선 여러 이견이 있지만 원칙적으로 범죄, 특히 약물 관련 범죄에 가혹한 법률은 임칙서가 보여준 행보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