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유무 (문단 편집) == 생애 == [include(틀:무신 정권 기구)] [[임연]]의 둘째 아들로 임연이 1270년 2월 25일(양력 3월 18일) [[등창]]으로 병사하자 정권을 장악하여 [[교정도감]]을 맡았다. 하지만 집권했을 때 임유무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인 이응렬과 임연의 심복인 송군비가 실권을 휘두르게 된다. 이 때 아직 [[원종(고려)|원종]]이 [[몽골]]에 [[폐위]] 사건을 해명하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원종이 그 소식을 듣고 [[개성시|개경]]으로 환도하라는 왕명을 내리자 이에 대해 임유무는 백관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하는데 백관들 대부분은 왕명을 따르기로 하여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젊은 임유무는 이를 무시하고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 산성별감(山城別監) 등을 보내 [[백성]]들을 동원하여 환도하지 못하게 막아 몽골군에 항전하기로 하는데 몽골군에게 항전하는 방침을 실행하기 위해 내륙의 백성들에게 산성과 해도로 [[피난]]시키면서 [[장군]]인 김문비에게 [[삼별초]] 중의 하나인 야별초를 거느리고 [[교동도]]에 주둔하게 하여 몽골군의 공격을 대비하게 했고, [[전국]] 각지에 포고령을 선포하여 [[대몽 항쟁]]에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미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린지가 오래였고 원종이랑 [[문신]]들뿐만 아니라 [[무신]]들도 개경 환도를 주장하여 임유무를 거역하면서 임유무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방침에 따라 배치한 지휘관들조차 몽골군과의 [[싸움]]을 포기하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몽골군에 항전하기로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원종은 임유무를 처단하기로 결정했으며 임유무의 측근들을 포섭했다. 임유무가 정권을 장악한지 3개월만이자 몽골군에 항전 준비를 한지 1개월도 되지 않은 1270년 5월 14일(양력 1270년 6월 4일), 원종의 명령을 받은 홍규[* 초명은 홍문계(洪文系)][* 임유무의 [[매부]]이면서 임연의 [[사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유무를 죽이는데 앞장섰다. 임유무 제거의 선봉에 섰던 홍규의 셋째 딸이 제27대 [[충숙왕]]의 [[왕후]]인 [[공원왕후 홍씨]]이다.], 송송례 등에 의해 임유무는 붙잡혔고 저자거리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경오정변''') 이때 임유무를 따르던 삼별초 병사들도 전부 그를 [[배신]]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다. 사후 동생 임유인과 측근 최종소도 끌러나와 저자거리에서 참수되었고 이응렬, 송군비 등은 [[유배]]되었으며 어머니, 형 임유간, 동생 임유거, 동생 임유제 등은 몽골로 압송되었다.[* 다만 끌려간 임유무의 어머니와 형, 동생들은 사형되지 않고 사면을 받아 몽골인이 되었고, '''[[부원배]]로 활동한다'''.] 이로써 '''1170년 [[무신정변]] 이후 100년간 고려를 지배하던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제대로 된 개경 환도(출륙환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