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용한 (문단 편집) == 논란 == * 《전쟁과 역사》 1권에서 [[신라]]의 정치 상황을 다루면서 주류사학계에서는 [[위서#s-1]](僞書)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를 주요 자료로 사용하여 비판을 받았다. 개정증보판인 '한국고대전쟁사'에서도 화랑세기를 그대로 인용하였고, 별도의 항목을 만들어 《화랑세기》가 위서일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신라의 정치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이나 고대 사회의 인간 관계 등을 묘사한 것을 보면 화랑세기의 신빙성이 높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서 인문채널 휴에서 위서라고 보는 쪽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점은 밝힌 바 있다. 다만 주로 다루는 연구분야가 아니라서 크게 돋보이는 점은 아니고, 위서논쟁을 의식하는지 [[삼국시대]] 중후반기관련 토크에서도 굳이 화랑세기나 그 내용을 언급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거의 삼국사기 등 기성 사서에 기반한 이야기로 진행하는 편이다. * '전쟁과 역사' 3권에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전까지는 [[몽골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한 유일한 나라였다고 했는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 2011년에 쓴 [[타라와 전투]]에 대한 [[http://www.dongabiz.com/ASP/HanaPB/article_view.php?category_id=6101&atno=1203061301&chap_no=1|기사]]를 보면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사실 그의 본업은 전쟁사가 아니고 조선전기 정치제도다. > [[일본군]] 시각에서 타라와 전투의 실책은 크게 2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방어선의 위치 선정이다. 요새화한 진지 구축을 통한 방어전은 상륙작전을 감행한 적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라와가 4일밖에 버티지 못한 이유는, 방어선을 해안에 포진시켰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방어를 원했다면, '''해변이 아닌 내륙 산지에 방어선을 둘러쳐'''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산호초]]인 타라와에는 내륙 산지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산호초가 아니어서 저걸 할 수 있었던 펠레리우에서 [[미군]]은 3달 동안 1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서야 완전 점령이 가능했다.] > > 둘째, 급박하게 바뀌는 위기 상황에 적절히 대응치 못하게 한 경직성이 문제였다. 만약 전투 첫날 미군 상륙부대 1진을 향해 일본군이 과감하게 공격했더라면 미군은 타라와 상륙에 실패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일본군들은 매뉴얼에만 집착해 기선을 제압할 기회를 놓쳤다. 타라와 전투 첫날 전세는 일본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미군 스스로도 전멸을 각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매뉴얼에 집착해 당시 그들의 전매특허인 만세돌격을 하지 않았다. 도미나리 소장과 시바자키 소장 모두 일본군에서는 드물게 무모한 공격을 싫어하는 장군이었던 탓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다만 [[지뢰]]며 철조망 같은 장애물을 해안가에 잔뜩 쌓아놨던데다 상륙도 이상한 데서 하는 바람에 기동성 자체가 떨어지다보니 상륙이 안 된 건데 그 상황에서 대체 어디에 돌격해서 싸우라는 이야기인지는 좀....] > > 어쨌든 타라와 사건으로 가뜩이나 공격적인 일본군은 이런 태도를 크게 비난하게 된다. 이후 상륙작전에서 일본군은 더더욱 무모한 돌격전술을 선호하게 됐고, 덕분에 일본군은 미군 대비 거의 10대 1의 희생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 '정설'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본인의 취지와 달리 '정설'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그에 대해 지적하면 자기는 '정설'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이에 대해 변명을 하긴 했지만 사후 핑계일 뿐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 위의 논란에 대해서 반론하자면, 블로그에서 서술한 글의 내용은, '정설'의 권위에 기대어 기존의 정설과 반대되거나 다른 내용의 학설을 주장하는 것을 억압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학자로서의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tud&logNo=221232683647&referrerCode=0&searchKeyword=%EC%A0%95%EC%84%A4|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민과 뒷이야기]]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것이 '정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는 학술적으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상대로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고, 본인이 모든 주제에 대해 연구를 해서 정설과는 다른 학설을 제시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어서 기존의 연구 결과에 바탕한 정설에 기반하여 진행하므로, 특별한 이견이나 이상이 없는 이상 '정설'이라고 소개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고, 본인의 평소 신념이나 자세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반론은 지속적으로 삭제되고 있는데, 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하면 될 것. * [[https://youtu.be/AhW7XBWs4wk|토크멘터리 전쟁사 72부]]를 보면 [[고려]]와 [[몽골제국]]의 관계에 대해 [[부마]]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최강의 [[동맹]]관계일 뿐이라 말했으며, 두 나라의 관계가 서로 대등한 [[사돈]]의 나라라는 허준 MC의 발언에도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확하게는 "[[몽골제국]]은 어떤 나라와도 대등한 [[외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정도를 덧붙였다.] 그러나 왕실혼인을 통해 고려의 위상을 밝히려는 연구들을 살펴보면, 고려를 몽골제국의 부마에게 수여된 투하령(投下領)으로 보는 견해(모리히나 마사히코, 2008), ‘부마와 국왕의 이중적 지위’로부터 고려를 외국왕이 통치하는 속국이자 부마의 속령으로 보는 견해(김호동, 2007) 등이 제시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부마를 겸하고 있는 고려국의 왕의 존재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의 비판[* [[동북아역사재단]]·[[경북대학교]] 한중교류연구원 엮음,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2011, 74쪽.]을 감안해도 두 나라의 관계는 결코 대등하고 최강의 사돈동맹관계는 아니었다. 몽골 중세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시잠츠는 "고려가 독립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형태로라도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밝힌 바 있다.[* Ishjamts N. et. al., Mongolyn ezent gürnii gadaad khariltsaa (ⅩⅢ~ⅩⅣ), 1995, 55~65쪽.][* 정확하게는 "차라리 식민지배라고 한다면 인정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현실과 정반대인 권력관계를 이미지화 시킬 수 있기에 그런듯.] * 국방TV에서 [[삼국지]]를 다루고 있는데, 이게 비판의 여지가 간혹 있다. 평소의 지론을 그대로 삼국지에 대입하는데, 그러다 보니 사실관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너무 과격한 형태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는 본업이 [[중국사]]가 아닌 [[여말선초]] 정치제도사라 생기는 문제로 보인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중 앞에 전문가로 이야기하는 자리라면 팩트체크는 좀 더 철저히 하는 것이 학자로서 옳은 일이기는 하다. 아무래도 모르는 것과 잘못 말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인데 학자에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예민한 문제이기도 하니... 업적 부분만 해도 둔전은 그 기원이 [[한무제]]로 거슬러 올라가고, [[공손찬]]도 둔전을 실시했다고 나오며, [[둔전(삼국지)]]문서만 해도 둔전이 조조의 고유 아이디어가 아니라 [[모개]], [[한호]], [[조지]], [[임준]], [[창자]] 등 [[조조]] 휘하의 재사들이 시작부터 디테일까지 계속 언급하는 것이 언급되지만, 조조를 띄워주기 위해서인지 [[제갈량]]이 조조의 둔전제를 따라했다는 식으로 언급했다. 구품중정제는 더하다. 구품중정제라는 명칭부터 [[구품관인법]]이라는 정식 명칭의 멸칭에 가까운 것일 정도로 구품중정제가 문제가 많은 제도였다는 것은 차처해도, '''구품중정제가 [[조조]]가 죽은 다음에 나온 제도'''라는 문제를 뛰어넘을 수 없다. 조조를 높이 평가한다면 당연히 구현령을 언급할 일이지, 이걸 건너뛰고 조조 사후에 나온 구품중정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쉴드 부분만 해도 [[여백사]]를 죽인 다음에 한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기억도 안 나는 말이라고 하면서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배송지가 주로 인용한 손성의 잡기에 언급된 '차라리 내가 다른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의 자구 정도의 변형이다. 간웅이라는 표현도 평화로울 때는 평범한 신하지만 난세에는 영웅이라는 말을 뒤틀은 것으로 언급하는데, 정사인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언급이 그대로 나온다. 난세의 영웅이라는 표현은 범엽이 지은 [[후한서]]에 등장하는데, 이 경우 풀 내용은 '치세의 '''간적''' 난세의 영웅'이다. 있는 표현을 없다고 했고, 인용한 표현은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무제기의 짜깁기다. * [[https://youtu.be/COBKvwO9DpE|삼국지 조조 뒤집기편]]에서 [[서주대학살]] 부분에 대한 논란. >그때는 조조가 그렇게 쎄지 않았어요. 그래도 [[도겸(삼국지)|도겸]]과 붙을때 조조는 가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나 이번에 죽을지도 몰라" 이러고 나가는데, 싸우다가 안 되니깐 도겸이 [[여포]]까지 끌어들이면서 수성전으로 가요. 그러니 조조가 이렇게 싸우다가는 체력 떨어지는 사람이 지고 이렇게 병력을 많이 소비하다보면 나중에 양패부상하거든. 그래서 서주에서 초토화 작전을 합니다. 도겸이 성에서 안나오니깐 주변 5개 군현을 싹쓸이해버려요. 뭐 만명이 넘게 죽고 강이 시체로 쌓이고 이렇게 되는데, 조조는 이거를 학살 행위가 아니라 전술적 행동이라고 생각했어요. 적의 전쟁 능력을 없애는 초토화 작전이다. 제가 조조를 도덕적으로 변호하는 건 아닌데, 현대 사회에서는 50년 전까지 [[베트남 전쟁]]에서도 이걸 썼어요. 요즘 욕먹는 민간인 폭격이, 사람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전쟁 능력을 없앤다는 거잖아요. 조조는 후퇴하면서 그걸 없애서 "다음번에 내가 올 때 네가 또 박혀있지 못하게 하고 나와 싸우게 하겠다." 그렇게 해서 서주를 점령하고 강적이던 여포까지 무찌르던 자기의 초토화 작전의 결과였다. 적을 치기 전에 적의 전쟁 능력을 없애라. 그래도 이건 도덕적으로 옹호할 순 없지만 당시 전쟁에서는 늘 있던 일이었다. * 임용한의 도겸이 여포까지 끌어들였다는 발언의 출처는 제시되지 않았다. 실제 역사 전문가들에 의한 언급과 자료 출처가 있으면 추가할 것. * 서주대학살은 조조의 전략적 선택이었냐, 감정적인 선택이었냐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 전략적 선택이란 해석 자체가 잘못이라고 보는 측은 [[서주대학살]] 항목을 참조할 것. * 임용한은 서주대학살에 대해 임용한은 "도덕적으로 변호할 순 없다"라고 하면서도, "전근대 이전엔 종종 있었던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물론 반대로 말하면, "그래도 결론은 권력을 위해 학살을 자행한 학살자란 소리"라는 반발이 있다. 임용한의 말을 옹호하는 측에선 그는 단지 [[서주대학살]]이 적의 전쟁수행능력을 제거하는 '초토화작전'이란 전략적 판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그 판단까지 잘했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선 임용한 본인도 대학살이 전략적으로도 후폭풍이 강했으며 결국 [[조조]]가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초토화작전 또한 절대 좋은 작전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물론 서주대학살을 흔한 사건 정도로 치부한 점 등은 논란은 있겠으나 그의 주장이 전반적으로 서주대학살 자체를 옹호하는 입장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이들의 의견. 이들에 의하면 임용한이 말하는 '전근대 시대에 학살이 종종 있었다' 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그 시대에 그런 사건이 존재했다는 발생여부'''' 를 일컫는 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조가 학살을 한 것은 이런 판단 때문이다' 라는 말은 ''''조조는 이러한 이유들로 자신의 행동에 근거를 삼았다고 분석된다'''' 라는 분석이지, '그 때는 그래도 되는 시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거나 '조조의 그 판단이 나은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 아니라는 것이다. 추가로 임용한에 대해 옹호하는 측은, 비판 측에서 [[베트남 전쟁]] 등 과거 전쟁들의 학살사례를 제시하는 것이 감정에 호소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시대에 학살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다른 시대에 학살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듯이, 어느 시대에 발생한 학살이 '나쁘다' 라는 것이 어느 시대에 학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하면 나쁘다' 라고 제약할 수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임용한은 학살을 직접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용한의 강의에 대해 오독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 역사적 인물의 선택을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 선택한다고 간주하고 있어, 감정적 요소에 의한 선택을 전면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주대학살]]에 대한 해석이다. 서주 침공이 전략적 판단이라는 주장의 기저에는 '[[조조]]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며 그러한 판단력에 근거해 서주 침공을 단행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물론 조조는 삼국시대의 대전략가이고 정치가로서 날카로운 판단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사실이나 그에 못지않게 그 예민한 예술가적 감수성 덕분에 일을 그르친 사례도 수두룩했다. 당장 연주목을 칭하자마자 원충 환소 등을 과거에 거슬렸다는 이유로 당시 세상의 끝이나 마찬가지였던 교주까지 쫓아가 죽였고, 좀 더 뒤에는 장제의 처를 취하려 들다가 조앙과 조안민을 잃고 정부인이 등을 돌리기도 했다. 거기에 관도대전에서는 전황이 밀리자 멘탈이 털려 순욱에게 징징거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문제는 후세 사람들이 그런 조조를 매우 이성적인 판단의 인간으로 변모시켰기에 서주대학살 전략설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임용한 교수는 서주대학살을 완벽하게 실패한 전략이라고 평하면서, '조조가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것인가'와는 별개로 도의적으로는 물론 전략적으로도 잘못된 사건이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 군사 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올재에서 출간한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번역서에서는 해설을 통해 다소 편향된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역사를 논하면서 평화주의와 군축 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다분히 군사주의적 논리 전개로 해석될 수 있다. 그 외에도 [[독소전쟁]]을 논하면서 [[독일]] 편향적 서술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임용한의 전쟁사 코너에서 군사주의적 논리가 심한 편이다. * 역사의 해석에 있어서 결과론적인 접근하는 경향이 크다. 예를 들어 임용한은 조선시대 [[태안군|태안]]반도 운하 건설이 실패한 이유가 그 목적이 [[중국]] [[대운하]]와 달리 경제성이 아니라 조세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중국 대운하의 목적은 조선 태안반도 운하건설과 같이 조세나 통제와 같은 정치적 목적이었다. 실제로 대운하가 북중국과 남중국을 통일하는 맥으로 활약한 것은 건설 후 수십년이 지난 [[당 고종]] 시기였다.[* 역사적으로 [[도로]]와 운송망은 정치적 목적에서 건설되고, 이것이 높은 경제성을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의 도로는 지방을 통제할 목적에서 건설되었으나, 그 도로를 중심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또한 태안반도, 판목운하가 건설되었다면 부유한 [[전남]]과 [[서울]]이 직통으로 이어지고, 당연히 그 물류가 많아졌으며 [[대동법]]도 더 빠른 시기에 시행되었을 것이다. [[대동법]]이 시행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대량의 물자가 안전하게 운송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태안반도에 운하가 건설되었다면 조선의 경제발전은 상당히 빨랐을 것이다. 실제로 대동법의 주창자였던 [[김육]]은 안면곶에 운하를 건설하였다.[* [[운하]]건설은 막대한 비용이 든다. [[중국]]이나 [[이집트]]처럼 단순히 평지를 파는 것이라면 문제가 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비용이 든다, 암반층이 등장하면 팔 수가 없다. 비슷한 예로 [[파나마 운하]]의 경우 드러나 암반층을 파는 것이 불가능하자, 아에 물을 산으로 올려서 배를 산으로 보내는 식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니까 태안반도의 운하건설은 20세기급 과학기술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최신작인 '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에서도 조선 측의 전쟁 대비 노력에 대해 결과론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