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오화변 (문단 편집) === 관서행의 목적은? === 《실록》의 기록에 사도세자는 영조 37년(1761) 4월 2일부터 22일까지 [[평안도|관서]] 지방을 여행하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관서행의 목적은 임오화변 관련 논쟁의 키 포인트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세자가 [[평양]]으로 놀러간 것이 아니라 실은 영조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를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이 있다. 평양은 [[평안도]]의 요충지로 조선 북방군의 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며, 사도세자의 외삼촌과 여동생 [[화완옹주]]의 시숙인 정휘량이 그 지휘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가 즉위 후 이 부분을 《실록》에서 날려버림으로서 진실은 미궁 속으로. 결정적으로 평안도 군대와 사도세자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료가 없어서 더 이상의 추론이 불가능한 상황. 뒷날 [[정조(조선)|정조]]는 사도세자의 《지문》을 지으면서 관서행의 목적은 역적들의 모의를 저지하기 위함이었으며, 홍계희가 병란을 일으키려 하자 관서 지방에서 급히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적었는데, 《실록》의 기록과는 많이 다른 내용이며 사도세자의 기록을 세초하고 즉위 초기부터 아버지의 반대파를 숙청한 정조의 입장상 아버지를 나쁘게 남기지 않으려는 시도가 계속 보이기 때문에 신용하기 어렵다. 정조의 이러한 포장은 정황상 말이 안되는 부분이 더 많다. 우선 변란을 막기 위함이라면 그냥 저런 일이 있다고 영조에게 보고하면 세자로서 임무는 끝이 난다. 자기가 평양까지 갈 일은 없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실수도 꼬투리를 잡고, 없으면 자기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극도의 모욕을 주고 괴롭힌게 영조이다. 그런데 세자가 변란의 조짐이 있다고 '자기 멋대로' 요충지인 [[평양]]까지 굳이 가서 직접 일을 처리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의도적이지 않지만, 역도를 놓치거나 모의가 발전해 실제 군사적 변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는 잘못이라도 저지른다고 생각해보자. 영조가 대체 세자를 어떻게 대할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영조를 극도로 두려워한 세자가 이렇게 리스크가 큰 돌출행동을 할 개연성이 떨어진다. 《실록》을 보면 관서행을 안 영조의 대응이 생각 외로 온건해서 단순 유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의 쿠데타 설대로라면 사도세자에 대한 처벌은 영조가 이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나타났을 텐데 영조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거기다 세자가 [[평양]]에서 돌아온 날인 4월 22일 유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유람'''을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며 주변에서 놀자고 꾀는 무리들을 물리치라고 한다.[* 《영조실록》 영조 37년(1761) 4월 22일 2번째 기사] 5월 초까지 유생과 신하들의 이런 잔소리는 계속된다. 단 이 시점에서 유생과 신하들이 모두 세자의 관서행 자체를 확실히 알고 있는지는 조금 불확실하다. 《실록》의 표현을 보면 '여항(閭巷)[* 일반 백성들을 표현함]에서 근거없이 지껄이는 말이 있다', '감히 떠도는 말에 대해 모두 믿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다'라고 나오기 대문이다. 물론 관서행을 알았더라도 예의상 직접적으로 세자를 추궁하지 않고 이런 소문이 나돈다는 식으로 돌려서 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자가 정말 관서에 다녀왔는지 확신하지는 못하고 '평소 세자께서 바깥으로 자주 놀러 나가다 보니, 이젠 관서까지 가신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처신을 잘하십시오'라고 단순한 충고를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자는 그게 아버지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홍봉한]]에게 의논한다. 결국 진현(임금을 만남)을 하는데 이게 1년 만에 아버지에게 간 거다. 이런 모습은 뭔가 큰일을 한 다음의 모습이 아니라 '''큰 잘못'''[* 단순히 '놀러 나간' 것이 왜 잘못인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위에 언급된 것처럼 평소 영조의 질책이 도가 지나쳤고, 세자가 이에 시달렸다는 점을 감안하자. 동궁에서 얌전히 공부만 하고 있어도 매일같이 혼나는 수준인데, 허락받지 않고 놀러나간 것만으로도 영조가 어떻게 화를 낼지 몰라서 세자가 겁을 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을 저지르고 그게 알려질 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세자가 진현했을 때 영조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세자는 자신의 관서행이 들키지 않은 것을 알고 기뻐했다. 이 일이 영조에게 알려진 건 5개월이나 지난 9월이었다. 특히 유람을 다니면 안 된다고 비판하는 상소를 대간들이 올리자 세자는 "야, 내가 진작 반성했는데 어찌 내 마음을 몰라주고 이런 글을 올리냐?" 하고 벌벌 떨었다. 결국은 이런 글이 올라갔다는 글이 <조보>에 실리고, 그 <조보>를 영조가 보고 격노해서 《[[승정원일기]]》를 가져오라고 명하면서 관서행이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조는 그러고도 세자를 직접 꾸짖지도 않고 관련자들만 처벌하고 조용히 묻었을 뿐이다. 세자의 석고대죄에도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비교적 부드럽게 넘어갔고, 덕분에 세자는 정말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로 사도세자 역모설이 떠돌기 시작한 것은 노론의 사주를 받았으니 하는 낭설이 떠도는 나경언이 고변서를 전달할 때였는데, 그는 자신이 바치려는 글이 사도세자의 반란 고변이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그가 바친 상소는 세자의 비행을 나열한 것일 뿐이었으며, 결국 그는 동궁을 모함하려 한 것이라고 실토하곤 처형된다. 또한 사도세자 죽음의 결정적 계기가 된 [[영빈 이씨]]의 말은 사도세자가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 아니라, '제정신이 아니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반란 시도가 있었다면, 그리고 편집증 강한 영조가 그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면 그 관련자들이 임오화변 이후에 대거 처형되었어야 하는데, 임오화변 이후 죽은 사람은 사도세자를 모시던 궁녀, 내시, 여승 등이 전부였고, 기껏해야 나중에 이 일을 뒤집으면 괜히 우리만 역적으로 몰린다는 홍봉한의 주장에 따라 사사된 조재호가 전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