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오화변 (문단 편집) ===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을 앓았는가? ===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쓴 책 《[[한중록]]》은 세자가 화병으로 인해 미친 거라고 묘사하고, 《영조실록》도 기본적으로 《한중록》의 묘사와 거의 일치한다. 심지어 소론 측 기록인 《현고기》에서도 [[사도세자]]의 정신병이나 살인은 부인하지 않으며 《한중록》의 주장과 배치되지 않는다.[* 다만 《현고기》는 소론 계열 당론서로서 시종일관 사도세자에게 우호적이고 노론에 적대적이다.] 반면, [[정조(조선)|정조]]의 주장이나 《고종실록》에 의하면 신동이라거나, 차기 군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로 표현된다. 《실록》은 조선 전기에는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고 한 게 큰 문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왕이 사초를 만들 때 마음대로 관여할 수 없었지만 이 시대엔 그렇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 시대의 사관들은 이상할 정도로 왕의 말을 잘 따라서, 기록하지 말라는 건 기록하지 않고 빼버렸다.[* 그 예로 영조 1년에 사형된 이천해의 발언은 영조의 명령 탓에 《실록》에 기록되지 못했다. 기록하지 말라고 하니까 다 적어 넣은 뒤 기록하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했던 [[태종(조선)|태종]]과 [[세종대왕]] 시대와는 딴판이다. 다만 이천해가 직접적으로 말한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일 뿐, 사관들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나름대로 돌려서 기록하였다.]] [[이인좌의 난]] 주모자였던 심유현의 진술 내용을 기록하면서 '''심유현의 말이 이천해의 말과 똑같았다.'''라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다른 기록에는 이천해의 행동 자체가 심유현의 사주라는 얘기가 있다. 즉, 이천해는 행차 중인 영조를 향해 길거리에서 대놓고 '''"선왕 살해범은 네놈이다!"'''라고 외쳤다는 뜻이다.] 《실록》이 이럴진데 《승정원일기》는 정조의 명령으로 세초된 부분이 더더욱 많고.《영조실록》 또한 정조 즉위 후 편찬하면서 대신 한 사람에게 사도세자 죽음 전후 10년 정도의 기록을 맡겨서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사도세자 처분 때 《실록》을 보면 사관이 영조가 직접 지은 <폐세자반교문>마저 내용이 심해서 싣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그러니 한쪽만 믿기보다는 각각 비교해보면서 복합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영조 31년(1755)부터 세자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영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세자의 광증이 《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한중록]]》에만 발견되니 그를 몰아내려는 음모였을 거라는 말이 있는데 아닐 가능성이 높다. "발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라고 적힌 부분은 최소한 그의 정신적 압박감이 크다는 점을 나타내고, 소론 측 기록인 《현고기》에는 세자가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철편을 휘둘러 사람을 때려죽인 일화가 있다. 《실록》에서도 "병이 있지만 봐 줄 수 없다."라고 했다. 한편 정조가 [[김조순]]에게 한 비밀 얘기를 적은 《영춘옥음기》에서도 사도세자의 병을 말했다. 장인인 [[홍봉한]]에게 세자가 직접 '나에게 병이 있으니 약을 구해달라.'고 쓴 편지도 있다. [[이덕일]]은 [[혜경궁]]이 《한중록》을 쓴 이유가 자기 친정을 위해서고, 세자를 일부러 미친 것으로 묘사했다고 하지만, 세자의 병에 대해서는 《실록》에서도 아들 정조도, 아버지 영조도, 장인 [[홍봉한]]도, 심지어 소론들까지도 모두 긍정했다. 2년 후인 1757년 세상을 떠난 할머니 [[인원왕후]], [[적모]] [[정성왕후]]는 제일 사도세자와 가까운만큼 더욱 잘 알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들조차 생전 할 수 있었던 조치는 대비와 중전이라는 지위에 있던만큼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중재하고, 학대받아 상처받은 사도세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세상을 떠나 이런 조치조차 없어진 후로는 결국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악화되어 숱한 사람을 죽이고 나아가 임오화변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가져온다. 사도세자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평 역시 《행장》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그것도 온양 온천에 행차했을 때 딱 한 번. 문제는 이때 그를 따랐던 사람은 500명 수준이었고, '''세자의 스승을 1명도 안 데려갔다'''고 한탄했음이 《실록》에 남아 있다. 근데 《행장》에는 온양으로 가서 매일마다 서연을 열었다고 한다. '''가르쳐 줄 사람이 1명도 없는 상황'''에서. 이것 역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의 말대로, 아버지 영조의 병적인 괴롭힘으로 인해 우울증과 화병을 앓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쓴 편지만 봐도 가슴이 답답하며 울음이 나고 마음이 아프니 약을 찾아봐 달라고 호소하는 글이 있고, 《실록》에 나타난 영조와의 대화 또한 미치기엔 충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조는 웃으면서 대화하다가 돌연 태도를 바꿔 세자를 죽일 듯이 혼냈고, 그때마다 세자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심지어 대답을 잘 해도 '조사하면 다 나와.' 하는 식으로 세자를 불신하며 혼냈다. 워낙 민감한 문제라 당대에도 기록하기 껄끄러운 문제였고, 파기된 기록도 있는데다, 남아있는 기록도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다. 다만 남인 계열 시파인 박하원(朴夏源)이 지은 《대천록》(待闡錄)이라는 책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광증으로 죽인 사람의 수를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드러난다. '세자가 중관, 내인,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 이는 《[[한중록]]》에서 생모 [[영빈 이씨]]의 내인마저 죽이고 내관 등을 처참하게 살해한 정황을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바와 합치된다. 단순히 이게 어느 남인 학자의 연구에서 그쳤다면 모르지만 문제는 그가 이 책을 《천유록》(闡幽錄)이라 이름 지어 정조에게 올렸고, 정조는 '''그 내용에 동감하면서도''' 곧바로 세상에 내놓지 못할 것을 알고 《대천록》이라 이름을 고치게 하여 저자에게 다시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세자가 100여 명을 때려 죽이고 [[영빈 이씨]]마저 해치려 했다는 《대천록》 내용은 소론 측 기록인 《현고기》에도 똑같이 나온다. 이는 영조가 직접 지어 전국적으로 반포한 <폐세자 반교문>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정조가 읽을 책에 선왕이 직접 지어 전국적으로 반포한 <폐세자 반교문>을 조작할 간 큰 신하가 있을 리 없다.] 나경언의 고변에 등장하는 사도세자의 후궁인 [[경빈 박씨(장조)|수칙 박씨]]도 그가 의대증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죽인 것이다. 당시 영조가 세자를 꾸짖을 때 처음으로 한 말이 수칙 박씨에 대한 것이었다. > 네가 [[경빈 박씨(장조)|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汝搏殺王孫之母),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또한 《실록》에 적힌 기록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정축년·무인년(1757-58) 이후부터 (사도세자의)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사도세자가)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 《영조실록》, 영조 38년(1762) 윤 5월 13일자 2014년에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의 [[정신과]] 의사들이 《[[한중록]]》을 분석한 결과, 《한중록》의 내용은 현대의 정신의학 지식이 없이 허구로 지어냈다고 보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중록》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묘사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연구 결과이다. (본문에서 인용한 글의 Lee DI은 물론 '[[이덕일]]'을 가리킨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으로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https://pdfs.semanticscholar.org/5b47/ae0ec3c51c0d7dcfe7866bd9ed869efed944.pdf|해당 논문]] 9페이지[* 상식적으로 현대적인 정신병의 진단 기준을 알았을 리가 없는 혜빈 홍씨가 순전히 창작으로서 이렇게 구체적인 증상을 지어내지는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