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오화변 (문단 편집) === [[노론 음모론#s-3.3|노론의 음모인가? ]] === 사도세자의 정신병 편력이 널리 알려지기 전까지 과거 가장 보편적으로 대중에 알려진 가설은 화변이 [[노론]]의 음모라는 것이었다.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와 김귀주, 홍봉한 등 노론들이 사도세자가 친소론임을 두려워해 모함해 죽였다는 것이다.[* 사람이나 가설에 따라선 친소론 성향은 아닌데 노론에 비판적이어서 그렇단 말도 있다. 그래도 노론 성향이 아니어서 모함당했다는 설은 맞다.] 이는 과거 훌륭한 임금에게 인격적 결함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구태의연한 편견, 이런 대형 사건에는 반드시 정치적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 그리고 정조가 사도세자를 띄우기 위해 왜곡한 사료인 현륭원 지문이 한때 한중록보다 신뢰성 있는 사료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인데, 현륭원 지문에는 사도세자가 역적들을 막으려 한 뛰어난 세자로 나오지만 정조의 눈물어린 왜곡에 불과하다.[* 가령 정조는 사도세자의 관서행을 사도세자가 역모를 막기 위해 떨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도세자를 수행한 군관 일기 등을 보면 그냥 명승지 돌아보면서 술먹고 놀았다. 즉 당대 비판처럼 그냥 논 것이 맞았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다는 연구는 의외로 60년대부터 있었으나 학계간 소통이 잘되지 않았던 과거의 한계로 인해서 사학계에서는 이런 의학계의 연구를 수용하지 못했고 한중록에 대한 의심도 다른 사료에 대한 의심에 비해서 과하게 계속되었다. 이러한 사도세자가 [[노론]] 때문에 죽었다는 설은 이덕일 등이 현대 주장해온 것은 아니고 조선 후기부터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세자가 미쳐서 자결시켰다'는 적나라한 내용보다는 '일부 신하들이 음모를 꾸며 왕의 눈을 흐리게 했다'는 주장이 왕가 체면에도 좋았기 때문. 영정조 시절에 [[소론]]이 공격한 대상은 노론 벽파였고 [[홍봉한]]에게는 우호적이었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도 1960년대부터 이은순 교수 등이 노론 주도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런 주장들은 《사도세자 행장》이나 《[[한중록]]》 등에 의존했을 뿐이라 《[[조선왕조실록]]》까지 참조한 후대의 주장들에 비해서 설득력이 약하다. 심지어 이은순 교수조차도 논문에서 자신의 주장은 한 가지 가정적 추론일 뿐 직접적인 근거가 없고, 더 연구가 필요한 주제라고 명시했다. 노론 음모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모두 친노론, 식민사학적 시각으로 몰아붙이며 매도하는 사람은 이덕일 정도다. 노론 음모론은 결정적으로 근거가 희박하다. 우선 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근거로 제기되는 점들은 다음과 같다. * 어렸을 때 [[경종(조선)|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이 그의 궁인이 되어서 소론에 유리한 얘기를 했다는 것. * [[나주 괘서 사건|나주 벽서 사건]] 등에서 소론을 처벌하기를 거부했다는 것. *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소론 조재호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 하지만 위의 설명과는 달리 세자가 가장 믿었던 사람은 [[소론]] 세력이 아니라 노론이었던 장인 [[홍봉한]]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비밀도 장인 홍봉한에게 이야기했다. 세자를 친소론으로 유도했다고 하는 경종의 궁인들은 [[사도세자]]가 7세일 때 쫓겨났다. 그들이 세자에게 공부보단 놀이와 무예를 더 좋아하게 했다는 죄는 있었지만, 만약 그들이 친소론적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10여 년 뒤에 갑자기 세자가 친소론이 되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을까? 거기에 애당초 정말로 그들이 친소론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증거가 없으니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소론]]을 편들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사도세자는 [[이인좌의 난]]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사도세자]] 항목에도 나오듯, 세자는 대리청정을 할 때에도 "알았다", "안 된다", "대조께 아뢰어 처리하겠다." 하는 정도 대답만 했다. 허울뿐인 대리청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일처리도 [[영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조가 크게 화를 냈기에, 세자가 독단적으로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종사와 관계없는 사소한 일만 해도 그랬고, 사법권(역모와 형벌에 관한 문제)은 아예 영조가 전담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으로 크게 배신감을 느끼던 상황에서도 [[이광좌]] 등 소론 계열 인사들을 보호했고, 훗날 심정연(沈鼎衍, ? ~ 1755) 등이 시험장 테러를 했을 때에도 [[박문수]]를 비롯한 소론 신하들을 매우 신뢰하였다.[* 물론 당시 소론 인물들은 대부분이 탄핵당했고, 무사했던 이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래서 조정은 노론 일색이 되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역적에 대해서 사도세자가 영조의 뜻에 거스르는 결정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 바보가 아닌 이상 예상하고도 남는다. 《실록》에서 소론의 처벌에 대해 "불허한다"는 말만 했던 세자이지만, 당시 상황을 보자면 세자는 자기 판단이 아니라 영조의 뜻을 따랐다고 봐야 한다. 죽기 직전에도 마찬가지다. 세자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홍봉한]]이 세자를 포기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자가 기댈 곳은 조재호뿐이었다. 정병설 교수는 세자가 조재호를 불렀으므로 세자가 친소론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세자가 친소론이라서가 아니라, 홍봉한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소론과 조재호뿐이었다는 것이다.[* 조재호는 [[효장세자]]의 장인이며, [[효순왕후]]의 친정아버지이고, [[조현명]]의 형이였던 [[조문명]]의 아들로 효장세자와 조문명, 조현명 부자 모두 영조가 아꼈던 인물이였다. 앞서 말한 휘항처럼 세자는 영조가 아꼈던 인물의 핏줄에 기대 영조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고 보는게 옮음직하다.] 솔직히 이건 음모론 수준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세자가 아무리 친소론이었다고 해도 당시 [[영조]]에겐 아들이라곤 [[사도세자]]뿐이므로, 아무리 영조가 노론에게 크게 기댔다고 해도 신하들이, 사실상 임금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궁지에 몰아넣고자 음모를 꾸몄다고 단정하기엔 지나친 감이 있다. 조선 같은 [[전제군주정]] 국가에서 왕의 유일한 후계자를 모함하는 미친 짓은 자살보다도 더한 짓이다. 만약 실패하면 사실상 역모로 취급되어 자신만이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모조리 몰락한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세자를 모함할 수가 없는 것이, 영조가 직접 자기 자손들을 다 박살내고 생판 남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지 않는 이상 결국 왕위는 영조의 후손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당시 살아있는 영조의 자손들이 전부 사도세자 아니면 그 자식들이었다.'''[* 영조의 다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는 사도세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10살의 나이로 죽었기에 후손이 남을 수가 없었다.] 즉 사도세자를 모함했다간 나중에 사도세자 아니면 정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중 하나에게는 반드시 앙갚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숙종(조선)|숙종]] 말기에 당파 싸움의 일환에서 일종의 택군 현상이 있었지만, 당시 숙종의 장성한 아들이 경종과 영조, 두 명이었기에 세자를 지지하는 당파와 영조를 지지하는 당파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영조에게는 살아 있는 아들이 세자뿐이고, 세자는 영조가 42세에 겨우 얻은 [[늦둥이]]였다. 영조가 계비를 들인다고 해도 새 왕자를 얻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고 실제로 영조의 정비/계비 소생 자녀는 없다. 그런데 왕의 유일한 후계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세자를 없애려고 한다면, 지금 당장 신나게 세자를 핍박해서 영조의 신임을 얻는다고 치더라도 그 뒤는 어쩌는가? 훗날 세자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말 그대로 모든 게 망하기 때문에 __상식적이라면 세자에게 아부를 해서 그제서라도 세자의 눈에 들어서 반대파를 몰아낼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다.__ 이 시기 즈음엔 영조의 나이가 당시로선 상당히 고령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영조의 [[어진]]은 51세 때 모습이다. 이미 그때 흰 수염이 치렁치렁했고, 사도세자가 사망했을 때에 영조는 69세였다. 태조를 제외하면 이미 당시 기준으로 역대 임금 중에 폐위된 광해군을 뛰어넘고 70대까지 살았던 태조의 뒤를 이어 역대 2위를 기록한 상태였으며, 태조가 62세로 퇴위했던 것을 감안하면 살아있는 임금 중에선 누구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상황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수명이나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46세)으로 본다면 (솔직히 지금 상황으로 보아도) 충분히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 왕은 평균수명이 짧은데 '''영조 때문에 길어졌다.''' 조선 임금 대부분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조선에서 장수한 왕들은 ([[태조(조선)|태조]], [[정종(조선)|정종]], [[광해군]]처럼) 대부분 죽기 전에 왕위에서 물러난 인물들이다. 영조 이전에 국왕으로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62세에 퇴위한 태조와 60세에 사망한 부왕 [[숙종(조선)|숙종]] 정도였다.][* 당시는 40대만 되어도 노인 대접을 받았고 50대면 노인으로 여길 정도였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을 당시 영조는 55세였다. 조정 입장에서는 영조의 죽음 이후를 생각할 만한 때였던 것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옹주들마저 [[사도세자]]의 눈치를 봤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노론 입장에선 상식이 있다면 궁지에 몰기보다는 도리어 잘 보여서 차기 왕이 될 세자가 자기네들을 좋게 보게 하는 게 더 이익이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사실 대신부터 대간에 이르기까지 온 조정이 계속 영조에게 세자를 너무 엄격히 대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특히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도 대놓고 '세자 저하가 잘 하시는데 왜 자꾸 갈굽니까?'라고 했고, 김재로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 대신들도 영조가 세자를 갈굴 때마다 말리며 세자를 거들었다. 후일 세자의 원수라고 선포된 [[홍계희]]나 김상로(金尙魯:1702~1766)조차도 세자를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벌 받은 적이 있다. 이간질의 대표주자로 거론되는 김상로는 영조가 '세자가 자신을 1년이나 찾아온 적이 없다.'고 하자 그런 일이 있었냐고 하면서, 잘 타이르면 세자 저하가 다신 안 그럴 거라고 오히려 세자를 옹호했다. 또한 홍봉한은 사위인 세자의 비행을 [[나경언]]의 고변 때까지는 숨겼다. 나경언의 고변 때 영조가 직접 한 말을 상기해보자. >"오늘날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죄인이다. '''한 사람도 내게 고한 이가 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세자를 비호했던 신하 중엔 영조가 후에 '''세손의 원수라고 했던 김상로'''도 있었다.[* 후엔 세자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하는데, 더 이상 비호해도 소용없고 되려 자신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억지로 그랬던 것일 수 있다.] 세자가 죽을 무렵 김상로는 세자를 옹호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그리고 홍봉한은, 영조가 이후 매번 이 일 때문에 화를 내며 그를 파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등용했다. 또한 [[풍산 홍씨]] 가문('''북당''')과 [[경주 김씨]] 가문('''남당''')은 당파만 같은 [[노론]]일 뿐이지 '''서로 죽일 듯이 으르렁거린 철천지 원수였다.''' 영조 시절 [[은언군]] 사건 때 [[김귀주]]는 [[정후겸]]과 연합해서 [[홍봉한]]을 역모로 공격하고 한유(韓鍮)를 사주해서 공격하는 등[* 물론 한유는 사도세자를 잘못 언급하여서 영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끔살]]당한다.] 결국 홍봉한을 실각시켰다. [[정조(조선)|정조]]의 즉위 이후에도 줄곧 홍봉한의 처벌을 요구하다가, 정조가 세손 시절 홍봉한을 죽이기 위해 자신까지 위협에 빠뜨렸다며 정조의 명으로 도리어 귀양을 떠났다. 게다가 [[사도세자]] 생전의 [[평양]] 서행 때도 김귀주는 이를 막지 못하고 감춘 홍봉한과 정휘량(鄭翬良,1706 ~ 1762)을 공격하는 상소를 밀봉해서 영조에게 올렸을 정도로, 이미 사도세자 생전부터 두 가문은 적대적인 관계였다. 이 밀봉 상소 이야기는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 8년 《실록》에서도 정조가 잠깐 언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이좋게 손잡고 세자를 제거했을까? 정상적으로 보자면 서로가 세자의 진정한 보호자라고 자처하여 세자에게 붙으려 했을 것이다. 실제로 두 가문은 서로가 세손, 즉 정조의 보호자라고 자처했다.[* 두 가문은 사도세자가 사망한 뒤에 서로가 세자를 죽였다며 사이좋게 싸우긴 했다.] 굳이 따지자면 세자를 보호하려고 세자의 비행을 감춰주다가 나경언의 고변 등으로 영조에게 걸려서 자신들까지 작살나게 생기자 당장 영조에게 죽을 판이라서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합세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자기랑 친해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자를 없앤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노론이 명백히 친소론 임금인 경종을 세자 시절에 해코지하려고 숙종과 결탁한 사례나 소론 준론이 친노론 임금인 영조를 없애기 위해 위의 김씨 성의 궁인을 찾는 옥사를 확대하라고 한 전례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나마도 세자를 직접 공격하지도 비방하지도 않는 형태로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었고, 세제가 명목상 [[삼수의 옥|반역 수괴]]였다던지 하는 명분이라도 나름대로 있었다. 반면 친소론이라는 증거도 없는 세자를 친노론이 아니니까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을 가능성도 없고, 만약 그렇다면 그 뒤의 정조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4년간 대리한 세자도 없앴는데 세손을 못 없애겠으며 자기네들이 죽인 세자의 아들이 승계하는 것을 미쳤다고 지지하겠는가. 훗날 홍인한, 정후겸이 대리청정을 막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조가 노골적으로 척신인 풍산 홍씨를 멀리하는 행보를 밟아서 그랬던 거고, 정조가 장성하기 전까지는 풍산 홍씨를 비롯한 노론 조정은 정조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세손과 잘 지냈다. 그리고 탕평당 소리까지 들으면서 영조의 말에 굽신대느라 당색이 별로 없던 풍산 홍씨와 적대한 후에도 정조는 정작 같은 노론이면서 의리를 내세우며 당색이 매우 강했던 경주 김씨들과는 무척이나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정조 즉위 과정의 최측근 세력인 [[김종수(조선)]]를 중심으로 하는 청명당이 그 노론 벽파의 전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론 = 反사도세자'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리고 사도세자를 변호하다가 자살한 스승인 영중추부사 이천보(李天輔, 1698 ~ 1761), 좌의정(세자시강원 부책임자 세자부 겸임. 세자의 교육을 담당함) [[음서#-3.1|이후]](李, 1694 ~ 1761) 우의정 민백상(閔百祥, 1711 ~ 1761)도 당론으로 보면 노론이었다. 그리고 영조가 고령이었다는 점을 다시 감안해야 한다는 것인데, 사도세자가 내일 왕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저질 사극 보고 사람들이 영조 시절에는 당파 싸움이 잦았고, 변란이나 옥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정국이 불안정한 시절로 오해한다. 하지만 실제 영조 시절에는 대규모 옥사나 반란이 거의 적었던 시절이었고, 끽해야 [[이인좌의 난]]이나 [[나주 괘서 사건]]정도였다. 특히 영조 시절에는 [[중종(조선)|중종]], [[광해군]], [[숙종(조선)|숙종]] 시절처럼 대규모 옥사나 [[환국(조선)|환국]]이 자주 일어나거나, [[선조(조선)|선조]]나 [[인조]] 시절처럼 대규모 외침도 없었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노론]]이나 [[소론]]도 과거와 다르게 많이 변했다. 노론의 경우에는 [[신임옥사|삼수의 옥]]으로 인해 노론 강경파가 사라졌고, 소론도 마찬가치로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 이후로 소론 강경파가 없어진 상황에서 당시에는 노론이나 소론 모두, 영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탕평파들이 집권한 상태였다. 그런 판국에 세자를 흔들려 하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행위였다. 세자가 공부를 안 한다고 비판하는 [[대간]]들이 영조에게 말 잘 했다고 칭찬받고 상을 받아도 노론소론[[남인]][[북인]]의 당색에 관계 없이 대신들이 '''"저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하고 오히려 상을 받은 대간들을 동정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도세자의 광증이 심해져서 궁인들을 마구 베어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찾아가서 대체 어쩌면 좋겠냐고 울면서 묻자 [[영빈 이씨]]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냐고 통곡했고 영조에게 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는데 [[혜경궁]]이 대경실색하며 '''"세자 험담을 왕에게 한 것을 세자가 알면 살아남지 못한다!"'''라고 미친 듯이 뜯어말렸을 정도였다.[* 실제로 영빈 이씨가 혜경궁의 충고도 무시하고 사도세자의 광증을 영조에게 폭로한 것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문에 손자인 정조가 영빈 이씨를 평생 미워했다고 한다.] 아내까지 저러는 판국인데 신하들은 오죽했을까. 또한 영조가 노론의 모함을 듣고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것은 영조의 지성을 매우 폄하하는 소리다. 영조가 노론의 [[이간질]]에 함몰될 사람이었다면 그 전에 [[정미환국]]이니 쌍거호대 정책을 비롯한 완론 탕평책을 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인좌의 난]]이후에도 소론 대신들을 계속 중용한 사람이 영조다. 영조는 숙종 때 역당으로 찍힌 남인 [[채제공]]조차도 중용했다. 게다가 [[남구만]], [[유상운]]까지 거론하며 "헤헷, 소론은 [[역적]]이고 우리가 정의라니까요!"라고 주장하는 노론을 개발살내고 "니들이 내 칼에 죽고 싶구나."라고 일갈하여 온 노론들에게 다신 당파 싸움 안 하겠다는 내용의 반성문까지 받아낸 임금이 영조다. 자신과 노론의 결백을 주장하는 《천의소감》을 편찬하면서도 당론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을 정도다. 그런 영조가 노론들의 싸바싸바에 넘어가 세자를 죽인다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해 보인다. 만약 세자가 죽은 시점이 영조가 나이를 먹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70대, 80대 시절이라면 납득은 가겠는데 사도세자를 본격적으로 갈구던 시절의 영조는 아직 정신이 온전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다 양보해서 노론이 사도세자를 싫어했다고 쳐도, 사도세자를 몰아내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가의 기록이 전혀 없다. 이간질을 했다는 소리는 이미 나경언의 고변과 영조의 반응을 통해 관서행과 같은 세자의 실제 비행조차도 보고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반박이 되었다. 그리고 노론 대신들은 표면상으로라도 사도세자를 옹호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험악해지기 시작했을 때도 신하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세자 저하에게 조금만 더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 '힘들더라도 주상 전하를 뵙고 노력한다면 주상께서도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라고 권고하며 관계를 풀어주려고 했다. 신하로서의 의무도 의무지만, 이런 식으로 현재 권력인 영조와 미래 권력인 세자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 지 알 수 없었다. 신하들로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런 노력을, 하다못해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다. 게다가 당시 영조가 정말로 세자를 죽이면, 말 그대로 당장 왕실이 위험할 수 있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세자를 죽인 뒤 영조도 곧 죽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었다. 임오화변 당시의 세손의 나이는 11세로 몇 년 뒤면 조선 시대엔 명목상 성인이라고 하나 그래도 한동안 영조의 지원이 필요한데, 이게 몇 년이나 갈 수 있을지 당시로선 도저히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세손이 아직 미성년자일 때 영조가 죽는다면 [[수렴청정]]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수렴청정을 해야 할 왕실의 큰 어른인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도 정작 세손과 겨우 7살밖에 차이나지 않았고 궁에 들어온 지 2,3년차라 정치 경험도 짧다. 세손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는 왕비가 아닌 세자빈인데다 명목상 폐세자의 아내라는 신분상 함부로 정치 일선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며,[* 성종의 친모인 [[인수대비]]와 다른 점이 이것이다. 인수대비는 어쨌든 남편인 [[의경세자]]가 단지 병으로 사망한 것이지 폐세자된 것이 아닌데다 이후 [[정희왕후]]의 지원과 주도로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어서 [[소혜왕후]]라는 시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반면 [[혜경궁 홍씨]]는 실제로도 세손이 명목상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서 정조의 정식 어머니 자격을 잃었고, 정조가 국왕으로서 궁여지책을 강구한 뒤에야 겨우 '자궁'(慈宮)이란 호칭을 받으며 대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인수대비]]의 아들인 성종은 인수대비 외에도 할머니 [[정희왕후]]와 숙모인 예종비 [[안순왕후]]도 있어서 뒷배경이 매우 든든했다. 하지만 세손 정조에겐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이쪽 역시 나이가 많지 않아(임오화변 당시 기준으로 28세) 왕실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다. 사도세자의 친모이자 세손의 친할머니인 [[영빈 이씨]]는 궁녀 출신 후궁이어서 처음부터 제외. 실제로는 세손이 장성할 때까지 영조가 충분히 오래 살아줘서 망정이지, 차기 국왕의 나이가 어린데 이를 뒷받침해줄 어른이 마땅치 않다면 왕실의 안위는 지극히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인조 대에서 갈라져서 8~10촌이나 되는 소현세자계나 [[인평대군]]계를 쉽게 옹립하기는 어렵고. 단종 대에 왕실 어른이 모두 사라져서 의정부가 [[황표정사]]로 위태위태하게 국정을 운영하다가 [[계유정난]]으로 피바람이 일어난 선례가 이미 있었다. 그 당시의 노론 신하들도 이를 무시할 정도로 바보들은 아니었다. 이상적인 방법으로 신하들이나 왕실 사람들이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거나 사도세자의 정신을 치료하려 하고, 이게 성과를 거뒀다면 가장 좋은 결과를 낳았겠지만, 이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당시 조선은 엄연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고, 일개 신하나 왕실 사람들이 나라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국왕과 왕세자에게 직접적으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그나마 사도세자를 달랠 수 있었고 영조를 상대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왕실 어른인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생존했을 때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인원왕후가 정정했을 때도 영조는 사도세자를 잔혹하게 학대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은혜를 백번 갚아도 모자랄 대왕대비의 올바른 충고 하나 안 들을 정도이고 "[[경종(조선)|경종]]이 [[상왕]]이 되어 이 시기에까지 장수했더라도 영조 손에 세자가 죽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영조부터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셈이다. 남은 건 위에 언급한 신하들의 원론적인 충고 정도가 고작인데 이걸로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18세기 중반 조선.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이란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이다. 기록에서 등장하는 각종 증상들을 보면 현대의 유능한 정신과 전문의 및 심리치료사들도 쉽게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데, 아예 이런 개념이 없던 시대에는 더더욱 해결이 불가능했다. 정리하자면, 신하들이 줄을 설 만한 사람이 현 임금(영조), 차기 왕(사도세자), 차차기 왕(정조)뿐인 상황에서, 안 그래도 지금 왕과 차기 왕의 관계가 [[시한폭탄]]이라 어느 한 쪽을 밀어주기는 지나치게 위험부담이 컸고 그럴싸한 [[명분]]도 없었다. 한 예로 임오화변의 흑막으로 의심받는 홍봉한조차도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분명 알았음에도[* 사도세자가 직접 약을 구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사도세자를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결국 이 일을 영조 앞에서 꺼낸 사람은 나경언과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게다가 이 3명은 관계가 먼 방계지간도 아니고 심지어 3대 친부자지간이다. 더군다나 이 음모가 성사된다고 해도, 뒷일을 장담하기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여차하면 왕실 자체가 박살나 판이 깨져버릴 상황이었다. 나경언이 이 일을 터트리자 대신들이 입을 모아 나경언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가 기어코 사단을 내버린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으로 일이 터지면서 결국 노론이든 소론이든 빨리 입장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 친아버지가 [[교지]]를 내려 친자식을 죽인 일이 벌어졌으니, 세자를 죽인 것을 옹호했다가는 훗날 영조가 후회하거나 세손이 즉위하면 뒷감당이 안 되고, 세자를 죽인 것을 비판하고 나서자니 당장 길길이 날뛰며 친자식도 죽여버린 영조가 그들도 죽여버릴까봐 무서운 상황이었다. 혜경궁 홍씨나 정순왕후 김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남편이 잘못되면 혜경궁 홍씨는 당장 자신의 처분부터 걱정해야할 판이었다. 설령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훗날 즉위한다 해도, 당장 혜경궁 홍씨 자신이 궁에서 쫓겨날 가능성은 넘치고도 남았다. 특히나 사도세자가 사사되고 [[폐위]]된다면 [[연좌제]]가 존재하는 당시 상황상 정조가 즉위할 가능성도 멀어진다. 후에 영조가 바로 사도세자를 복권해준 것도 이 때문. 효장세자의 장자로 입적되었다 한들 친부가 죄인이면 정통성에 흠이 남을 수 밖에 없고, 정통성 때문에 한평생 치를 떨어야 했던 영조가 아끼던 세손에게 그런 멍에까지 남겨줄 이유는 없었다. 거기에 정조가 성장 과정 중 잘못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시에도 영조에게 아들은 없어도 손자는 더 있었다. 그나마 영조가 정조를 매우 총애하고 세손으로 확실하게 인정해주었으며, 혜경궁 홍씨를 보호해서 '자궁'(慈宮)이라는 어정쩡한 위치로나마 궁에 남은 것이다. 만약 영조가 조금 더 냉혹했다면 정통성과 연좌제를 명분으로 홍씨를 폐출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정순왕후도 마찬가지. 정순왕후 김씨도 자신에게 후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만약 사도세자를 노려 밀어내려 했다면 서슬퍼런 영조가 아끼는, 세손까지 제거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오히려 정순왕후 입장에서는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게 현명했고 훗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사실 그 이전에 사도세자 사사 당시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데다 왕후 자리에 앉은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친정도 큰 권력이 있지 않았다. 굳이 꼬아서 생각해보자면 혜경궁 홍씨의 친정을 밀어내려고 사도세자를 밀어내려 했다고는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임오화변 당시 정순왕후는 아예 개입한 흔적이 없다.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에조차 임오화변 당시에 그런 기록은 없는 것을 보면 의심할 만한 근거가 없는 셈. 다만 훗날 정조를 둘러싸고 두 가문이 으르렁거리게 되긴 한다. 영조 성격과 당시 국정 장악력을 볼 때 궁중 여인과 그 친족들이 세자와 세손까지 좌지우지하도록 놔둘 사람도 아니었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