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오화변 (문단 편집) == 해석 ==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약]]이나 교형이 아닌 [[뒤주]]에 가둬서 죽인 이유는 [[정조(조선)|세손]]의 [[조선/왕사|정통성]]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근거로 영조가 세자를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것이 분명하고, 처음에 영조가 세자에게 [[자살|자결]]을 종용하고 나중에가면 세자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데도 태연하게 식사하고 일한 것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약이나 교형은 엄연히 죄인에게 내리는 공식적인 형벌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세손을 [[조선/왕사|후계]]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사도세자를 건너뛰고 세손이 바로 왕위에 오르면, 세자가 임금의 생부로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를 노릇이다. 그러니 영조 입장에서 [[연산군]]과 같은 미치광이 폭군을 만들지 않으려면 세자를 죽여버리기로 한것이다. 그런데 세자가 공식적인 형벌로 죽는다면, 세손(훗날의 [[정조(조선)|정조]])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의 모든 자식들은 죄인의 자손으로서 [[조선/왕사|정통성]]을 잃는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왕위계승자가 사라지므로 [[인조]](4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왕족을 찾아 왕을 옹립해야 할 상황이 된다. 원래 왕족도 9촌이 넘어가면 왕족의 지위가 사라지기 때문에[* 면세 혜택조차 없고 과거에 나아가는 데도 일반 양반들과 차등 없이 응시할 수 있었다.] 이씨 왕조는 이어진다 쳐도 [[효종(조선)|효종]]으로부터 이어온 왕권의 혈연적 정통성이 많이 뒤흔들릴 게 너무나 뻔하였다. 그렇기에 처음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종용했고, 신하들이 반대하여 실패하자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임으로써 법적인 형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아들을 훈계하다 벌어진 사고사 정도로 처리하려 한 것이다. 세자에게 내린 시호 중 '사'(思) 자는 영조가 대외적으로는 '비뚤어진 아들을 바로잡으려 했을 뿐'이라는 뜻을 전하려 했다는 한 가지 증거이다.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이틀 전 세자는 칼을 들고 수구(수로 입구)를 통해 경희궁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이 소문이 퍼지고 [[영빈 이씨]]가 이를 공론화하여 '대처분'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세자가 공식적인 형벌을 받고 죽으면 세손을 비롯한 왕손들은 단순한 죄가 아닌 역모죄에 연좌될 수가 있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왜 죽였는지는 조선 역사상 최고의 논쟁거리이다. 여러 가지 정치적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 또한 여러모로 엇갈린다.[* 큰 틀에서는 위 내용처럼 세손을 위해서 였던 것으로 이해되지만, 문제는 세손이 세자를 제치고 선택할 선택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선 사도세자 외의 아들조차 없는 상황에서,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에게 바로 왕위를 물릴 수도 없고 세손을 어디 양자로 입적시킬 수도 없다. 그렇다면 좋든 싫든 세손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사도세자를 건드리는 것은 곧 세손을 건드리는 것이 된다. 즉 영조가 어떻게 생각을 했든 세손을 위한다면 사도세자의 문제를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든지 적어도 공론화를 시켜 이런 문제가 있으니 이렇게 진행한다고 합의가 되도록 판을 벌였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삽시간에 신하들의 반대도 완전히 강압으로 뿌리치고 강행해버린다. 후에 영조가 어떤 조치를 취했건 간에, 처음부터 사도세자를 정신병이 있어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하든지 자신이 사도세자에게 양위하여 [[루이 19세|형식적으로라도 즉위시키고 곧바로 세손에게 양위하게 하여]] 태상왕인 영조가 대리청정하든지 최소한 세손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아들로 즉위하는 일은 없게 할 수 있었음에도 영조 스스로가 세손의 정통성에 가장 큰 타격을 직접 준 것이다.][* 그러나 태상왕의 대리청정은 가능성이 많이 떨어진다. 일본의 [[인세이]]만 봐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이지 할아버지가 아니고, 조선의 경우도 세종 시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버지 태종이지 법적으로 할아버지(실질적으로는 백부)였던 노상왕 이방과가 아니었으니 전례를 따지게 되면 영조 입장에서도 피곤해질 상황이었다. 당장 어린 왕의 입장에서도 아무리 잘 대해준다 한들 할아버지보다는 아버지에게 정서적으로 친근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영조 본인의 나이가 이미 칠순이 가까웠다. 안그래도 사도세자가 늦둥이라 이 때 고작 27세였는데, 영조가 아무리 건강관리를 열심히 해 장수한다 해도 사도세자보다 일찍 사망할 터였고 아무리 잘 쳐도 사도세자는 40대 초반 정도의 충분히 활동할 만한 나이일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기록이 엇갈리게 된 이유는 사관들이 끌려나가는 바람에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상황이 매우 간략하게만 적혀 있으며[* 사관들이 남긴 개인적 기록에 따르면 사관이 이런 자리에서 나갈 수 없다고 죽기살기로 버텼으나 군졸들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당시 상황을 가장 잘 기록했을 《[[승정원일기]]》를 세손 시절 [[정조(조선)|정조]]가 영조에게 요청하여 파기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세손은 《승정원일기》가 복수의 도구로 이용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또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이 혹은 누가 봐도 강상죄 및 반역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행동들이 그대로 담겼기 때문에 폐기해달라고 영조에게 청했다 한다. 정조 또한 자신의 일기인 《[[일성록]]》을 임오화변 전후를 포함해 두 달 이상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정확한 상황이나 정조의 심정도 파악하기 힘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