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오화변 (문단 편집) == 갈등의 원인 ==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원인을 찾자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 또 하나는 두 사람이 처했던 성장 배경과 정치적 환경의 차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는 다르게 일종의 무골이었다. 체심비풍[* 크고 뚱뚱하다는 뜻]이라는 묘사가 정확히 존재하며 영조부터가 세자가 어릴 때부터 많이 먹고 비대하다고[* 세자가 할머니인 인원왕후의 처소에서 과식을 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소리가 거칠다, 가마에 탔는데 벌써 낑기더라, 내가 저 나이 땐 저렇지 않았다 등이 있다.] 자주 언급하고, 대신들에게 사도세자의 체격이 크다는 점을 거듭 강조할 정도로 자신과는 체형이 상이함을 인식했던 것 같다. 《영조실록》에서 고조할아버지 효종과 닮았다는 기록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못 들었던 효종의 무기를 15세에 들기도 했다. 힘도 세고 무예에 관심이 많았으며 외유나 사냥도 나갔던 점을 보면 세종이나 경종처럼 운동 부족으로 푹 퍼진 비만이라기보다는, 조상 중 태조 이성계나 정종, 어깨 너비로 유명했던 효종처럼 몸집 자체가 크고 다부진 [[근육돼지]] 체형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영조는 어진만 봐도 왕이 되기 전이나 왕이 된 후나 둘 다 가늘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보여준다. 일단 조상 핏줄 덕분인지 본인이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고, 운동도 싫어하진 않았으며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서 승마, 달리기, 국궁 같은 격한 운동을 했고 이런 점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영조에게 이것은 그저 운동이었지, 그걸 넘어서 무예에 대한 선호로 이어지진 않았다. 영조의 주요 관심사는 글 공부였으며, 무예는 부가적인 것이었다. 둘의 [[성격]]도 확연히 달랐다. 외부의 요구에 느슨히 대응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엔 활달하고 과감한 사도세자와 달리, 영조는 매사 조심스럽고 신중하지만 기민하고 민첩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영조가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 너무 조심성 없이 일을 막 처리한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영조는 당쟁 속에서 간신히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타파하기 위해 세력의 균형을 맞추는데 집중하고, 사안 하나 하나에도 당파들의 이해 관계를 따져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 반면 세자는 탕평에 영조만큼 신경을 기울이진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왕위가 약속된 어린 세자에게는 눈앞의 개혁해야할 문제가 보였을 뿐, 힘의 균형이나 이해 관계같은 것은 겪어본 적 없기에 느끼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영조에게 자라면서 점점 자신을 닮기는 커녕 외양부터 자신과 다르고 거기다 유교적 소양을 닦는 공부보다 그림, 환상 소설, 무예를 더 즐기는 모습은 영 못마땅했을 터였다. 또한 영조는 일식삼찬과 검박한 옷[* 일상복은 평민이나 다름없는 차림에 낡으면 기워입기조차 했다고 한다.]으로 왕임에도 최대한 소박한 생활을 지향하며 금주령을 내릴 정도로 매사 근검절약하려고[* 그래도 자신이 사랑하는 딸들의 혼례와 장례엔 아낌없이 돈을 썼다.] 하는 것에 비해, 사도세자는 관서 외유를 나가거나 잔치와 굿을 벌이고 하사품을 내리는 등의 일로 세자궁 예산이 텅텅 비고 민간에다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빌려댔을 정도로 경제관념이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가 세자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의대증[* 옷을 입을 때마다 사도세자가 족족 찢거나 태우고, 그 과정에서 사람도 죽이며 난리를 피워대서 옷 한벌을 갈아입기 위해 수십벌이 필요했다. 한복, 그것도 세자가 왕을 뵙거나 행사 참석을 위해 예를 갖추어 입는 의장은 한벌 짓는 데 들어가는 재료, 장식, 수공도 다 엄청난 고가품이다. 세탁할 때는 그때마다 다 풀어 천 상태로 빤 다음 다시 바느질해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다. 궁에 침방이라는 부서가 따로 있고 상위부서 대접을 받았으며 빨래가 중노동이었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침방 나인 혹은 이 빨래에 쓰일 물을 길어나르는 무수리였다는 설을 생각해 보면...] 등, 본인이 저지른 사건사고를 처리하는 데도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물론 사도세자가 사고쳐서 지은 이 빚은 영조가 다 갚아야 했다.] 사도세자가 [[조울증]]이 맞다면 조증 삽화기간에 벌일 수 있는 상식 밖의 [[사치]]와 돌발적인 행동력, 울증으로 인한 폭행, 자살시도같은 극단적인 행각이 설명이 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매일 정해진 업무일정을 소화하는[* 뒤주에서 사도세자가 죽어가던 칠팔일 동안에도 변함없이 정해진 시간에 수라를 먹고 취침을 하고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의무에 충실하고 꼼꼼한 영조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냥 보통의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자신과 성격이 너무 안 맞거나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면 관계가 불편해지는데, 영조 입장에서는 자신이 간신히 지켜낸 왕위를 계승해야 할 아들이 생긴 외모부터 하는 행동까지 하나같이 이러니 미워질 수 밖에 없었다. 둘이 타고난 기질 차이가 이토록 큰 데다 영조의 성격은 이런 점을 관대하게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갖는 '고집이 강하고 자기 방식에 자부심을 느끼며 강요하는' 특성도 있었지만, 숙종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이 고집 세고 자기중심적이며 강한 성격은 심지어 정조 때까지도 이어진다. 두 사람이 처해있던 환경도 너무 달랐다. 영조는 [[숙빈 최씨|어머니]]가 [[인현왕후]] 복위에 힘을 보태면서 태생적으로 [[노론]]에 속했다. 숙종과 노론이 장희빈 소생인 [[경종(조선)|경종]]을 대신해서 자신을 차기 왕으로 밀기 시작하자, 경종이 세자이던 초기 시절부터 줄곧 이복형인 그와 경쟁 관계였으며 이는 경종의 즉위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기록도 빈약하고 형편없이 격이 낮은 집안이었기에, 영조는 왕세자로서의 대우나 조기 제왕학 수업을 받는 것조차 언감생심 기대할 수 없었다. 같은 숙빈 소생의 동복 형제도 있었지만 아기 때 요절해 아무도 곁에 남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왕자라면 흔히 받을 수 있는 외가 쪽 정치적 지원이나 마음 터놓고 어울리며 신뢰할 친[[동기]]도 하나 없는 고립무원의 신세인데, 그 와중에 이복 형 경종은 비록 입지가 불안했지만 엄연히 정식으로 책봉받은 세자였고 어머니 사이의 일로 악연이 있었으며 이복 동생 [[연령군]]은 아버지가 가장 귀여워하는 아들이었다. 노론도 연잉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관계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노론 쪽 어머니를 가졌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었다. 경종도 부왕과 노론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지만 영조 역시 연잉군 시절부터, 경종이 세자로서 대리청정하던 10년의 기간과 경종으로부터 왕세제로 책봉받은 뒤 왕이 되기까지 5년까지 도합 15년여를 항상 불안한 환경에 있었다. 나약한 성격의 경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숙청도 있었으며 이때 영조는 폐세제까지 자처해야 했다. [[신임옥사]] 참조. 더군다나 즉위 후에는 전국적인 반란인 [[이인좌의 난]]까지 겪고 재위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다. 이처럼 영조의 생애는 태어나면서부터 궁정 암투 한복판에 있었고, 믿을 만한 이는 많지 않았으며 신분과 목숨을 늘 신하들에게 위협받는 판이었다. 실제로 영조는 왕자 시절에 가장 사랑했던 [[정빈 이씨]]와 그 아들 [[효장세자]] 등 그나마 아끼던 사람들을 정적들의 손에 잃었다. 때문에 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왕세제 시절까지 극도의 위협감 속에 정적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정치적인 행동이나 튀는 걸 자제하고 스스로 공부에 매진하면서 모범적인 세제로 행동해야 했다. 만약에 무예를 좋아한다거나 무기를 모으거나 무사를 만난 정황이 보이면 역모로 몰리기에 딱 좋았다. 여기에 아버지인 숙종에게 물려받은 온화하지 못하고 극도로 불같은 면까지 맞물리면서, 영조의 성격은 나이를 먹을수록 대단히 편협하고 누군가 마음에 안 들면 꼬장 피우며 끝까지 싫어하고 의심하는 수준으로 뒤틀린다.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딴판이었다. 우선 왕위계승자임이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다. 늦둥이 아들로서 잠재적인 경쟁자인 남자 형제가 하나도 없었다. 이복형 [[효장세자]]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그 이외에는 전부 여자 형제들이였다. 또한 [[숙의 문씨]] 이전까진 자신의 생모 [[영빈 이씨]]가 부왕의 사랑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가장 많은 자녀를 둔 후궁이었고, [[인원왕후|자신을 사랑해 주는 대왕대비인 할머니]], [[정성왕후|친자식처럼 아끼고 보호해준 적모]], 극진히 생각해주는 생모, 다정한 동복 누나들과 여동생까지 정서적으로 성장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지지자들을 풍부히 갖추었다. 서자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효장세자도 후궁 태생의 서자였고, 적자가 없는 이상 어차피 법적으로 문제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왕자가 단 한 명 뿐이니 노론과 소론이 각자 자기들의 왕자를 정해서 밀어주려야 밀어주기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조건들이 맞물려 사도세자는 모두의 축복 속에 태어나, 극진히 떠받들리며 자라는 동안 당파를 초월해서 지지를 받았고 당연히 아버지같은 신분 컴플렉스를 가지지도 않았다. 여기에 영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숙종이 불지른 [[환국(조선)|환국]] 정치의 후유증으로 피비린내나는 당파 싸움으로 엉망이 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성장했지만, 사도세자는 영조가 반역 진압과 탕평책으로 신권과 당파 싸움을 약화시키고 당정을 장악해 강한 왕권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사대부들이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의 영조가 부러워할 만한 완벽한 환경이었다. 사도세자는 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라는 신분 덕분에 대신들이 임오화변 때까지도 그의 비행을 고발하거나 의논하려고 시도하긴 커녕 감추는데 급급했으며, 사도세자를 처분하려는 영조를 필사적으로 말리고 스승들은 세자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려고 할 정도로 죽는 순간까지 신하들의 충성과 보호를 받았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나이가 있었다. 사도세자가 변을 당하기 전부터 이미 영조는 '''역대 왕 중에 최고령'''이었던 것. 사도세자도 내심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았을 법하며, 신하들 입장에서는 당장 내일 왕이 승하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인데 언제 왕이 될 지 모를 세자를 탓하거나 비행을 고자질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이토록 영조와 반대 상황인 사도세자는 훨씬 행동 거지가 자유로웠고 신하들도 사도세자가 잡서를 읽거나 무예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걸 가지고 딱히 물고 늘어지지 않았으며 어차피 너무 이른 나이에 완벽한 교육환경을 갖춘 터라 공부 좀 덜하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과거의 영조처럼 목숨마저 위험할만큼 절실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영조가 보기에도 사도세자가 공부를 안해 그렇지 근본 자질은 총명해 보였던 건 사실이고, 국방이나 무예에 관심이 많다는 점도 분명 왕의 덕목 중 하나다. 단지 두 사람의 주 관심사, 방향성이나 전망이 달랐다. 근본적인 문제는 피비린내 나는 환국 정치의 끝자락을 경험했고 본인이 그 영향으로 당파 싸움에 휘말려, 죽을 뻔했던 영조로선 세자의 이런 여유로운 행동을 감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던 것 같다. 부실한 정통성과 보복이 이어지는 정치 환경을 타파하고자 영조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노론의 끊임없는 토적(=소론 처벌)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영조에게 자신의 탕평책을 이어가고 정치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복잡한 당파 관계를 조율할 정치적 안목과, 유학자들인 사대부를 찍어누르고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학문적 기량을 갖춘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자칫 잘못하면 탕평책은 무산되고 자신이 겪었던 보복 정치와 환국이 재현될 터였다. 사도세자의 자질이나 관심사는 만약에 조선 초였다면 가산점이 되었지 감점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효종(조선)|효종]]만 해도 전후 왕으로서 국방 강화와 함께 무예에 관심을 보였지만, 딱히 왕으로서의 부족함을 심각하게 질타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효종같이 무예 못지않게 공부와 품행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모를까, 사도세자의 행동은 극도의 위기감을 가진 영조가 보기에는 너무나 수준 미달이었다. 자신과 달리 탄탄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정치적 세심함은 커녕, 유교군주에 대한 마땅한 기대에도 부합하지 않는 행동만 벌이는 세자에 대해 한심함과 답답함을 넘어 분노로까지 이어졌던 듯하다. 또한 고령의 나이는 영조 본인에게 가장 큰 압박이었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을 제외하더라도 40대~50대에 죽는 일이 흔했고, 과로에 시달리던 역대 조선 왕들은 평균적으로 40대에 사망했다. 그런데 사도세자를 얻었을 때 영조의 나이는 42세로, 조선 시대 기준으로 당장 몇년 후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이전에 효장세자를 잃은 경험까지 있던 영조는 하나뿐인 계승자가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크나큰 조바심을 느꼈고, 사도세자를 아주 일찌감치 친어머니와 떼어내 따로 거하게 하며 2세 때 동궁으로 책봉해 왕위 계승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이것도 사도세자의 병을 만든 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현대적인 표현으론 너무 이른 연령에 애착형성이 불안해지고, 행동거지가 의심스러운 궁인들에게 둘러싸여 나쁜 영향을 받게 됐다는 것. 또한 영조는 세자의 교육에 의욕이 너무 넘쳤는지 직접 교재를 만드는 등, 너무 깊고 까다롭게 개입했다. 훗날 영조도 사도세자의 일로 깨달음을 얻었는지 정조에게도 강도 높은 공부를 시키긴 했지만, 적어도 사도세자보다는 진도도 천천히 나갔고 교육도 어느정도 나이가 찬 4세 때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이쪽은 정조가 도리어 공부를 열심히 잘 했다.] 반대로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 영조의 압박은 너무 지나쳤고 대체 왜 저러는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도세자도 대리 청정을 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낸다고 자부했지만 영조의 타박은 끝이 없었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정쟁 속에서 피비린내를 맡으며 홀로 크다시피 한 영조와 달리,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의 사이를 그나마 중재하고 막아주던 [[화평옹주]]와 [[인원왕후]],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서 애틋했던 [[화협옹주]]와 [[정성왕후]] 같은 가족 내 지지자들을 민감한 시기에 연이어 잃은 것도 감정 폭이 큰 사도세자에겐 타격이 심했을 것이다. 사랑하던 후궁과 자식들을 계속해 잃으면서도 그전부터 척박한 환경을 견뎌 온 영조는 자기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따사롭던 어린 날의 보호막을 잃고 무시무시한 왕인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사도세자는 그렇지 못했다. 만약에 영조도 그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 안 놓이고 보다 안정적인 환경을 누리며 살아왔다면 우리가 아는 영조의 컴플렉스와 강박, 그로 인해 후계자를 향한 기대치도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아무래도 사도도 역사보다는 수월하게 세자 기간을 보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영조가 그 험난한 환경을 겪었음에도 본인은 진짜 이해심 많고 좋은 성격을 수양해서 자신과는 다른 사도세자의 성격과 입장을 감안하고, 컴플렉스를 투사하지 않고 사도세자가 타고난 자질을 긍정적인 쪽으로 발전시켜 주려는 지혜로운 아버지가 되었다면 부자 관계와 왕위 계승 모두 안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반대 사례가 영조의 증조부였던 [[효종(조선)|효종]]이다. 효종도 어떤 면에서는 영조보다 더 평지풍파 지독한 정치환경을 겪고 형 [[소현세자]]의 죽음 후 겨우 왕위를 이었지만, 아내와 자식들과 사이가 좋았고 그중에서도 (사도세자처럼) 외아들인 세자를 지지해주며 모범적인 부자관계를 유지했다. 그 세자였던 [[현종(조선)|현종]]은 이런 안정적인 계승 과정을 바탕으로 마지막-후대에는 조선의 헤게모니([[송시열]])마저 극복하고 왕권을 공고히 했다. 불행히도 영조는 이러한 증조부의 성품을 전혀 물려받지 않은 듯.][* 하다못해 효종까지 갈 것도 없이 할아버지인 현종의 온화한 성품을 물려받았어도 이런 참상은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선 친할머니인 [[명성왕후]]의 성품을 물려받아서 그렇다지만 이것도 사실상 틀린것이 명성왕후 본인은 다혈질이긴해도 의외로 여러 공주들을 편애 없이 대하였고, 아들 숙종이 수렴첨정도 없이 친정을 단행하여 명성왕후는 홍수의 변, 인경왕후 사후 계비 간택 같은 왕실 내 친족관계 문제에 개입하는 것 외에는 영조처럼 아들인 숙종에게 큰 압박을 가한다든가 아예 무시하다시피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선왕의 왕비인 왕대비가 국왕인 자식을 감싸고 내정 개입을 하는 건 워낙 동서고금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일이라 문정왕후가 돌아왔냐는 비판은 들어도 영조처럼 아예 이해가 안되거나 신하들이 모두 말리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애초에 대비인 본인을 확실히 지지하는 적지 않은 신하와 세력을 동원한 것이다. 한마디로 영조가 명성왕후의 성격을 상당히 물려받았다곤 해도 사도세자를 학대한 행위는 사실상 별개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하필이면 당대의 정치 환경은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상태인데다, 아버지 영조는 효종이나 현종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자식을 개인적으로 대하는데 있어서만큼은 여렸던 할머니 명성왕후도 닮지 않았고, 극히 엄격하고 예민하며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조바심까지 있었다. 한번 미운 털이 확실하게 박히자 그걸 되돌릴 수 없었다. 이런 부자간의 판이하게 다른 성격과 성장배경의 차이, 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의 결과는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