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오화변 (문단 편집) === [[선희궁]](영빈 이씨)의 고백 ===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매일 석고대죄를 했지만 영조의 반응은 없었다[* 《실록》 기록을 보면 나경언이 고변한 바로 다음날부터 뒤주에 갇히는 날까지 매일 '왕세자가 시민당에서 대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종종 궁관등을 보내어 문안을 올렸지만 영조는 답이 없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사도세자는 불안해졌고 나중에는 영조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기어이 없애겠다."'''는 등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말이 많다. 세자가 정신병에 걸려서 횡설수설했다는 얘기도 있고, 부왕을 죽이겠다는 말인데 차마 이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없어서 주어(세자)와 목적어(영조)를 빼고 기록했다는 얘기도 있다. 왕이자 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을 기어이 없애겠다고 말한 게 진짜라면 《[[한중록]]》에 나온 것처럼 궁궐 안이 흉흉해질 만하다. 이즈음 사도세자의 친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영조를 만났는데, 그건 종사를 위해 세자를 죽이라는 말이었다. 영조는 이 말을 들은 다음 날 세자를 죽였다.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사오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정리에 못 하올 일이오되, 성궁을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지와 종사를 평안히 하옵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하오소서. 부자의 정으로 차마 이리하시나 병이니, 병을 어찌 책망하오리까. 처분은 하오시나 은혜는 끼치오셔 세손 모자를 편안케 하오소서.''' 영빈 이씨가 말한 것은 세자가 말하기를 아버지를 죽이겠다느니 했다는 것,[* 저 정도로 궁지에 몰리면 충분히 할 만한 말이다. 부모 존속살해사건의 [[이은석(범죄자)|이은석]]의 사례나 [[구의동 고3 존속살인 사건]]에서 보듯, 현대에도 부모가 자식을 하도 갈궈댄 탓에 자식이 맛이 가버려서 부모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사도세자는 '''무려 20년이 넘게''' 학대를 당해 정신병에 시달렸다. 심지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마저 예상한 상태였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차라리 아버지를 죽여야 내가 살겠다''' 같은 소리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영조한테 죽었고.] 그러니까 [[정조(조선)|세손]]과 [[혜경궁]]을 보전하여 종사를 안전케 하려면 '''병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는 세자가 영조뿐만이 아니라 세손까지도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한중록]]》의 기록에 따르면 아내와 자녀들에게만 아니라 그나마 극진히 모시던 어머니에게까지도 나중에는 불손하게 대하는 등 병증이 심해졌다. >경진 탄일에[* 사망 2년 전인 1760년 세자의 생일. 참고로 영조는 '''세자의 생일 때마다 세자를 신하들 앞에 세워놓고 앞담화를 하고 [[자아비판]]을 시켰다.''' 자세한 것은 [[사도세자]] 문서를 참고할 것.] 또 무슨 일로 격화가 대단히 오르셔 그날부터 부모 위하시는 공경하시는 말씀을 못하시고, 상말로, 천지를 분리하지 못하듯이 노엽고 서러워하셨다. "살아서 무엇 할까. 살아서 무엇 할까. 살아서 무엇 할까." 선희궁께 공손하지 못한 말을 많이 하시고, 세손 남매 문안하니 크게 소리 지르시며, 부모 몰라보는 것이 자식은 알아보랴! 썩 물러가라." 하시니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살 어린 아이들이 아버님 생신이라 인사하여 뵈려 하다가 엄한 호령을 듣고 크게 놀라던 모습이 오죽하리오. 병환이 심하시되 나에게나 괴로이 구셔도 어머님께는 그리 못하시더니 그 날에는 병환을 감추지 못하셨다. 전일 선희궁께서 비록 병환 말씀을 들으셔도 혹 과한 말인가 의심도 하시다가 처음으로 보시고 크게 놀라 아무런 말씀도 못하셨다. 병환이 점점 깊어지셔서 칠순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시고 자녀를 사랑하시던 것을 잊으시고, 그리하셨다. 기록을 보면 세자로 인해 '삼종'([[효종(조선)|효종]], [[현종(조선)|현종]], [[숙종(조선)|숙종]], 영조는 숙종의 아들)으로 이어지는 왕통이 끊어지고 왕실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에 영조는 '대처분'을 감행하지만 이에도 신하들의 반발이 있었다. 특히 도승지 이이장 등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직전에 어찌 아녀자의 말만 듣고 국본을 해칠 수 있냐며 반대한 것인데, 영조는 반발한 자들을 모조리 처벌하며 강행한 것이다. 대의를 위한 결단이라고 해도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섰다는 증거도 없이 단지 그 말만 가지고 죽인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것은 어머니의 말은 그저 명분 찾기일 뿐[* 사실 세자의 허물을 굳이 찾으라면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면 영조가 애지중지하는 세손의 입지에도 타격이 간다.] 영조가 진작부터 세자를 폐하는 수준이 아니라 죽이기로 계획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부분이다.[* 세자가 있는 상태에서 세손을 왕으로 세우기도 힘들고, 세자를 폐서인한다고 하면 세손의 정통성에 흠집이 생기고, 영조의 성격대로 강행한다 쳐도 미치광이 대원군이(게다가 당시 사도세자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다) 멀쩡히 있는 것도 국가의 장래를 위해 좋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담담하고 후회없는 반응을 보였던 영조와는 달리, 영빈 이씨는 아들의 죽음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 한탄하다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난 바로 다음날 사망했다. 정황상 자살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영조는 종사를 위한 결단을 한 공이 크다 하여 그녀에게 '의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사도세자계를 제외한 그녀의 후손들은 대부분 불우했다. 성년까지 살아서 작호를 받은 것은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3명이었으나, 앞의 두 옹주는 일찍 죽었으며 아들인 사도세자 역시 일찍 죽었다. 그나마 오래 살았던 게 막내 [[화완옹주]].[* 그나마도 화완옹주의 양자인 [[정후겸]]과 정조가 서로 물고 뜯었다.] 또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남성 직계는 [[헌종(조선)|헌종]] 때 끊기고 사도세자의 다른 아들계는 정치사에 얽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등 박살날 뻔했다가 어찌어찌 복위되었지만, 결국 [[철종(조선)|철종]] 이후로 사도세자의 남자 쪽 후손은 실질적으로 단절되어 [[효종(조선)|효종]]의 남성 직계는 끊어졌고, 이후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후손인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조선 왕조를 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