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영신 (문단 편집) === 교육자로서 === 1899년 11월 20일 [[전라북도]] [[금산군]] 군일면 상옥리(現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1리)에서 아버지 임구환(任九桓, 1874. 5. 9 ~ ?)[* 풍천임씨세보 제2권 104쪽에는 임선호(任瑄鎬)로 등재돼 있다.]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경순(金敬順, 1869. 5. 6 ~ ?)[* 김응서(金應瑞)의 딸이다.] 사이의 6남 6녀 중 차녀, 다섯째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고향 마을에 설립한 서당에 다니다가 [[1909년]]에 금산군에 있는 심광(心光)학교에 입학했으나 시집을 보내려는 집안의 뜻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담을 넘어서 등교했지만 키가 가장 커서 몰래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들통나 이후 동네에선 "저렇게 큰 계집애가 학교엘 다니다니... 저 계집아이는 예절도 모르고 부모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야."라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후 잠시동안 집에 있다가 다시 등교했고, [[1914년]]에 무사히 졸업했다고 한다.] [[1914년]]에는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전주 기전여학교]]에 입학했으며, 재학 당시 [[기독교]] 여학생의 소모임을 주관하고 신앙 활동을 했다. 1918년 졸업 후 [[천안시|천안군]] 양대학교에서 교사 일을 하다가 1919년 3월 13일 오후 1시에 [[전주시|전주부]] [[풍남문]] 밖 시장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참가했고,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1919년 6월 3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09&evntId=0034990067&evntdowngbn=Y&indpnId=000002118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고]], 검사 측에서 공소했으나 9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75&evntId=0034983408&evntdowngbn=Y&indpnId=000001499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어]] 곧 출옥했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 現 히로시마조가쿠인고등학교]로 몰래 유학가서 2년을 공부하다가 귀국했고, 1922년까지 [[영명고등학교|공주 영명여학교]]와 [[이화학당]] 교사를 거쳤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하자 그 장면을 대량으로 찍은 사진집을 들고 [[이승만]]에게 전달하기 위해 도미하였다.[* 임영신, 《My forty year fight for Korea - The Thrilling Personal Story of Korea's Joan of Arc》, 1951, A.A. Wyn, p. 159-161] 1925년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가 6년을 공부해서 <한국 불교도들의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하는 길>이란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33년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 등을 맡으며 1935년 경영난에 빠진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해서 교장 자리에 올랐다.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창설 당시 중앙보육학교 대표로, 이듬해 부인대 지도위원으로서 각각 참여해 친일 의혹이 있었으나[* 이름만 걸어두는 수준으로 실제 활동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친일파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강하며, 오히려 지하 독립운동 활동을 위한 위장 전술로 보는 시선이 커졌다. [[민족문제연구소]] 또한 2009년 입장을 바꾸어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창씨개명을 아예 안한 것 등으로 보아 소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의 공보비서를 역임했던 최기일의 회고록에 따르면 임영신은 오히려 종종 [[이승만]] 앞에서 이화여전의 교장이었던 [[김활란]]에 대해 [[친일파]]라고 험담을 했다고 한다.] 1945년 8.15 광복 후 기존의 중앙보육학교를 중앙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한 뒤, 이듬해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을 세워 초대 이사장으로 13년간 재직했다. 다른 한편 1947년에는 '중앙여자전문학교'로, 1948년에는 남녀공학 '중앙대학'으로 각각 개편해서 학장으로 등극하여 1961년까지 재직했다. 1961년 이사장에 다시 등극했다가 2년 후 임민규에게 승계하면서 총장직에 복귀했으며, 1972년 이사장으로 또 추대되면서 양자 [[임철순]] 부총장을 총장으로 승격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