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시수도 (문단 편집) === 한때 고려되었던 임시수도 === * 쿠이비셰프(현재명 [[사마라(러시아)|사마라]]) -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밀고 들어오자 [[소련]] 정부가 수도를 이곳으로 임시 이전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모스크바 사수를 결심한 스탈린에 의해 거부되었다. 다만 유사시를 대비해 대부분의 기관은 쿠이비셰프를 비롯해 [[예카테린부르크|스베르들롭스크]], [[카잔]], [[튜멘]] 등 후방의 여러 도시로 이전하였다. * [[수원시|수원]] - 6.25 발발 당시 정부에서 제일 처음 천도를 결정한 곳이 수원이었다. 단 발표 얼마 안 지나고 금세 취소되고, 또 너무 빨리 내려와 버린 북한군과 한국 정부(...) 때문에 정작 실제 임시수도는 달아보지 못했다. * [[공주시|공주]] 장기지구 - [[박정희]] 정권은 [[서울특별시|서울]]이 군사적으로 전방인 문제와 서울의 집중화를 해결할 목적[* 서울 집중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대표적으로 상하수도 문제)는 당시 정권에서도 큰 골칫거리라, 서울 편입 예정지였던 지금의 [[광명시]] 북부마저도 [[행정구역 개편/수도권/서울개편론/광명시 서울 편입|최규하 정부까지는 서울 편입을 보류했다가 전두환이 집권하자마자 배제했을 정도였다.]]]으로, [[남북통일|통일]] 이후에는 서울로 환도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비교적 후방 지역에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한다는 소위 '''백지계획'''을 세웠다. 1977년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키고, [[충청도|충청지방]]의 [[논산시|논산]], [[보은군|보은]], [[공주시|공주]], [[천안시]][* 천안(당시 천원군) 목천 지역은 훗날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된다. 행정수도 이전계획에 참여했던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독립기념관 입지 선정에도 관여하면서, 교통과 지세가 좋아 행정수도 후보지 중 하나로 삼았던 목천 지역(행정수도 이전계획 당시 명칭은 '천원지구')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했다.] 등을 후보지로 검토하여 '공주 장기지구'를 임시행정수도 부지로 최종 낙점하였다.[* [[정부종합청사]]·[[대한민국 국회의사당|국회]]·[[대법원]] 등 수도 기능이 입지할 부지의 중심부가 당시 행정구역으로 공주군 장기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해당되어, '장기지구'란 이름이 붙었다. 이 때의 부지는 현재의 공주시 신관동·월송동, 우성면·의당면 각 일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서부, [[연기면]]·[[금남면(세종)|금남면]] 각 일부 등에 해당됐다. 즉, 당시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지역은 오늘날 세종특별자치시(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서쪽 내지는 중심부에 해당된다. 공주군 장기면의 대부분은 세종시에 흡수되었으며, 남은 3개리는 월송동에 편입되었다.][* 장기지구는 원래 초기 검토 대상에는 없었으며, '[[공주시|공주지구]]'와 '[[대평동(세종특별자치시)|대평지구]]'라는 2개의 지구의 각 일부였다. 이 중 '''대평지구'''는 공교롭게도 '''오늘날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거의 일치'''한다(!). ~~[[선견지명]]?~~ 그런데 정작 당시 선정위원들의 최종평가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가, 그 옆의 공주지구(현재의 공주시 시가지에 더 가까운 부지로, 역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음)와 절충해 만든 장기지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되어 최종 확정됐다.] 구체적인 [[도시계획]][* 심지어 1996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주경기장을 포함한 스포츠타운 부지까지 지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박정희]] [[대한민국 제4공화국|정부]] 때 [[테크노크라트]]로 유명한 [[오원철]]이 프로젝트를 총괄했으며, 참여한 전문가들로 경제학자이자 관료인 [[김재익]]·[[박승]]·[[김만제]], 건축가 [[김수근]], 건축·도시계획가이자 전 국회의원인 [[김진애]] 등이 있다. 특히 [[도시계획]], [[건축]] 등의 분야에서는 국가적인 대규모 프로젝트였음을 반영하듯, 당시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앞서 언급된 김수근을 비롯해 엄덕문, 윤장섭, 박병주, 주종원, 강병기, 황용주 등)이 대거 참여했다.]과 도시 건설, [[공공기관]] 이전 일정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1979년 말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 및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압박으로 인한 안보위기 등으로 추진동력이 떨어지다가, 결국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백지계획은 [[이름값|말 그대로 백지화되었다.]] 다만 이 계획은 훗날 [[둔산신도시]] 개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2004년 [[노무현]] 정권의 신행정수도 추진으로 이 계획은 간접적으로 계승되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가 탄생하였다. 상기 각주에서 언급됐듯이, 현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의 대부분은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시가지에 해당된다. [[http://blog.daum.net/cosmicchung/7185636|당시 말단 실무자로 참여했던 김진애 의원의 포스팅. 박정희의 수도이전 계획과 현 행정도시의 입지 비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