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시수도 (문단 편집) ==== [[중국사]] ==== * [[베이징시]] - [[명나라]] 초기 3대 황제 [[영락제]]가 [[정난의 변]] 이후 [[난징]]에서 즉위한 뒤 연왕(燕王)시절 자신의 본거지였던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 경사(京師)[* '수도'를 의미]라고 불렀는데 이후 황제들의 치세에 여러번 난징을 다시 경사(京師)로 고치고, 베이징을 임시수도를 의미하는 행재(行在)로 고치는 등[* 물론 베이징을 행재로 고쳤을 때에도 황제들은 베이징에 머물렀다.] 몇 차례 정식 수도와 임시 수도 지위를 오가다가 명나라의 정식 수도로 정착했다. 참고로 명대에는 난징에도 수도 베이징과 마찬가지로 중앙 관청들이 있었고, 베이징에서 쓰는 북방 [[관화]] 이외에 난징에서 쓰는 남방 [[관화]]가 따로 존재했다. * [[항저우시]] - 위에 언급된 행재(行在)의 시조.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들어서자 언젠가는 반드시 수도 [[카이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항저우를 행재라 하여[* 임안(臨安)이라고도 불렀다.] 임시수도로 정했다. 실제로는 망할 때까지 계속 항저우에 있었으나, 명목상으로는 끝까지 임시수도로 남았다. 이 때문에 항저우의 궁성이나 관청은 크게 짓지 않았고 능묘도 초라한 편이었다. * [[뤄양시]] -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상하이에서 격전이 벌어지자 일본군이 장강을 따라 난징을 침공할 것을 우려한 장제스가 잠시 뤄양으로 수도를 옮겼었다. * [[충칭시]] - [[중일전쟁]] 기간 [[중국]]([[중화민국]])의 임시수도였다. 국공내전 때도 임시수도가 되었으나, 곧 함락됐다. * [[광저우시]] - [[국공내전]] 중 [[난징]]이 공산군에게 함락되어 수도가 되었으나 1949년 [[10월 14일]] 함락당했다. * [[청두시]] - 중일전쟁 때 충칭까지 함락되면 이곳이 수도가 될 예정이었으나, 충칭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국공내전 중 충칭이 함락되자 이곳이 국민정부의 최후의 수도가 되었으나, [[군벌]]들이 반기를 일으켜 공산군에 항복함으로 공산군에게 넘어갔다. 청두가 함락되기 직전 장제스는 [[국부천대]]로 타이완으로 도망가게 된다. 이후 중화민국의 수도는 사실상 [[타이베이]]가 되었다. 이후의 수도 문제는 중화민국의 국가 정체성과도 연결이 되는 복잡한 문제인데 [[국부천대]] 및 [[양안관계]] 문서에 나와 있다. 사실, 청두의 임시수도로의 역사는 [[당나라]]때에 더 유명한데, [[안사의 난]], [[황소의 난]] 때에 두 번이나 임시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실 임시 수도라는 인식조차 없어서 지나치기 쉬운데 [[촉한]]도 성도는 임시 수도 취급했다. 그 증거로 수도라고 하는데 성도를 성도윤으로 승급하지 않고 끝까지 촉군으로 놔뒀고 법적 수도는 장안이었다. (낙양이 아닌 이유는 손권의 칭제 이후 장차 위를 멸망시킬 경우 삼하[* 하남(낙양), 하내, 하동] 지역을 오의 영유권으로 인정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