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술농민봉기 (문단 편집) === 기타 지역의 농민 봉기 === * 제주도 >우리가 비록 관가에 억울함을 호소해도 서울의 양반이라 번잡한 화전문서에는 익숙치 못하고, 또 반드시 감색과 영이방이 옆에서 간섭할 것이다. 비록 관가가 불쌍히 여긴다 해도 감세가 되겠느냐? 우리는 겨울을 날 것이 없어 필경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것이다. 그러니 그 화전세 매긴 문서를 빼앗아 불에 태우는 것이 낫다. 또 감색(관리와 아전)의 집을 허물어 그들이 화전세를 과다하게 부과했기 때문에 당했음을 알게 하면 우리 관가는 반드시 백성의 소원에 따라 영원히 과다하게 부과하는 폐단을 없애 줄 것이다. >---- >제주농민봉기 당시 주모자 장환(張煥)의 발언 제주도는 제주만의 독특한 조세제도와 관권의 횡포로 인해 오랫동안 도민의 불만이 누적되어 왔었다. 그리하여 1862년에만 3번의 봉기가 발생했었다. 첫번째 봉기는 9월경 통문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시작됐다. 통문을 읽고 조만송(趙萬松), 장환(張煥)을 비롯한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9월 12일 하장도에서 모였다. 사람들이 등소운동을 하기로 하자 장환이 나서서 봉기를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머뭇거리자 조만송은 왜 말이 없냐고 다그쳤고,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여전히 머뭇거렸다. 그러자 일행 중 한 사람이 돌을 들어 동의를 표했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사람들은 조만송과 장환을 따라 감색을 습격하고 이들의 문서와 장부를 탈취해 불태웠다. 9월 13일, 천여명의 화전민이 모여들어 감색(관리와 아전)들의 집을 때려부쉈다. 9월 14일에는 역시 사람들이 모였으나 성문이 닫힌 뒤라 9월 15일 새벽에 성문이 열리자 성내로 진입했다. 군중은 제주목사를 만나려고 했지만 마침 이날 장례식이 있어 저녁이 될 때까지 진전된 것이 없었다. 그러자 조명순이라는 자가 군중을 선동하여 감관과 이방의 집을 때려부수었는데, 난동 이후 군중은 처벌이 두려워 객사 앞에서 단체로 곡소리를 냈다. 이에 목사가 군중 앞에서 억울함을 들어주겠다고 회유하자 군중은 감세를 요구했고 목사는 이를 수용했다. 1차 봉기의 승리는 이후 이어질 2차와 3차 봉기에 영향을 주었다. 1차 봉기 이후 목사는 민심 수습을 위해 순시를 시작했으나 봉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2차 봉기가 터졌다. 1차 봉기가 주로 화전민이 중심이었다면 2차 봉기는 대다수의 제주도민으로 그 주체가 확대되었다. 강제검(姜悌儉)을 주동으로 하여 만여 명의 군중이 10월 6일 제주성에 난입했다. 이들은 소위 '5죄인'이라고 불리는 아전들을 찾아내기 위해 5죄인의 집을 습격하고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집까지 부수었다. 이렇게 기세를 올리며 농민들은 목사를 만나 5죄인의 처단을 요구했다. 목사는 중앙에 보고한 뒤 처리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믿기로 한 농민들은 관아를 빠져나오며 앞서 아전들의 집에서 탈취한 포목들을 쌓고는 불태웠다. 밤이 되자 일부 군중은 타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농민들은 습격대상을 토호층과 상인들에까지 넓혔다. 그리하여 제주도 곳곳에서 부자, 아전, 상인들의 집과 재산이 부숴지거나 불에 탔다. 봉기는 며칠 간 계속되다 끝났고, 목사는 참가자들을 잡아들였으나 수십여 명의 군중이 아우성을 치며 구속자들을 구출해냈다. 11월이 되자 다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퍼졌다. 목사는 재봉기를 막기 위해 애를 썼지만 11월 15일 강제검의 주동 아래 수만여 명이 제주성 동문 근처 연무정에 집결했다. 군중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가옥을 부수며 기세를 올렸고 기가 질린 목사는 제주성의 문을 닫았다. 16일 목사는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종용했으나 17일 일부 군중이 남문 부근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농민들은 제주성 내로 진입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관속들은 도망하기에 바빴고 군중은 목사를 압박하며 '''"백성을 거스르고 백성을 속인 놈은 관장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또한 이때에 성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제주성 내의 사람들도 점차 봉기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주동자 강제검은 목사를 낚아채고는 객사로 끌고가 강제로 하직시켜 버렸고 목사는 화북포로 쫓겨났다. 일이 이렇게 되자 민중의 분노를 산 '5죄인' 중 한 명이 자살했는데, 그래도 분이 안 풀린 군중은 자살한 사람의 아들과 동생까지 살해했다. 한편 제주목을 완전히 장악한 군중들은 19일부터 자신들이 치안과 행정을 보았으며 강제검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목사 노릇까지 했다. 그 사이 목사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만나 반격을 준비했고, 실제로 반격을 가해 강제검을 체포하기도 했으나 성내에서 군중들이 목사 일행을 저지하고 강제검을 구출했다. 분노한 군중들은 목사의 재공격을 막기 위해 목사를 도운 사령을 붙잡아 모욕을 주고 [[린치]]를 가해 살해했다. 그리하여 군중은 여전히 제주목을 점령하게 되었고, 이는 다음 해 1월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새로운 제주목사가 부임하자 강제검은 그동안의 폐정 개혁 관련 문서를 제출하고는 시행을 요구하고 물러났다. 강제검은 제주목사에게 압박을 주고자 재봉기를 꾀했으나 이를 알아차린 목사에 의해 체포됐다. 조정에서는 안핵사를 파견하고 봉기 당시의 목사를 비롯한 관리 17명을 처벌했으며 강제검을 비롯한 주모자 22명을 효수하였다. * 함흥 * 광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