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술농민봉기 (문단 편집) === 충청도의 농민 봉기 === [[대덕구|회덕]]에서는 5월 10일 봉기가 발생하여 관청을 포위하고 수령을 위협했으며, 양반과 아전의 집 74채를 부수고 불질렀다. 군중들은 회덕 지역에서만 끝나지 않고 주변의 [[청주시]]에까지 진출하여 그곳의 양반들을 습격하기까지 했다. 조정에서는 주동자를 처형했지만 수령의 처벌에는 소극적으로 임했다. [[공주시|공주]]에서는 5월 10일 수백여 명의 농민들이 봉기했다. 관아에서는 해산을 종용하며 대표를 뽑아 보내라고 회유했으나, 군중들은 자신들의 요구조건 11개 조항을 정하고 사람을 계속 모았다. 11일 6,000여 명으로 불어난 농민들은 요구사항을 관아에 제출하자 그 기세에 눌린 충청감사는 이를 수락했다. 농민들은 해산하면서 주변 마을에 있는 아전과 관리들의 집 10여 채를 습격했다. 이 봉기는 지역주민이 아닌 다른 지역의 사람이 주모자로 참여했으며 지역의 서리도 역시 주모자로 참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정에서는 이 봉기를 '민란'이 아니라 그저 '도적' 혹은' 반란'으로 인식했는지 엄중한 처리를 명령하여 주모자 6명을 참수하고 수령은 파직했다. [[논산|은진]]에서는 5월 10일 수천여 명이 궐기하여 62채의 민가를 습격해 불을 질렀다. 다만 아전이나 관리들보다는 양반층을 향한 공격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충청도 지역이 사대부가 많은 곳이라 이들의 무단지배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군중들은 은진 지역을 넘어서 전라도 여산까지 진출했는데, 이는 도(道) 단위를 넘어서 벌어졌기에 조정을 경악시켰다. 조정에서는 주모자들을 효수하고 관련자들을 엄형을 내리는 강경책을 썼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많은 불만을 사서 재봉기가 일어날 뻔 하였으나 [[암행어사]]의 파견 등으로 파국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은군|회인]]에서는 5월 14일 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서는 벌채 금지에 대항하는 나무꾼(초군)들을 주축으로 한 군중이 마을 곳곳에서 양반과 아전의 집을 보이는 족족 불태웠고 관아에 난입하여 현감에게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들이밀며 이행을 요구했다. 현감은 겁을 먹고 요구조건을 수락했으나 군중은 다음날인 15일에도 양반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조정에서는 주동자 4명을 처벌했으나 현감에 대해서 처벌을 내렸는지는 불확실하다. [[청주시|문의]]에서는 5월 14일에 수천여 명의 군중이 몽둥이를 들고 양반과 아전의 집을 습격하고 관아에서 현감을 위협했다. 현감이 말을 듣지 않자 군중은 그를 가마에 태워 거리에 끌고 다니면서 온갖 모욕을 다 주었다. 결국 다음날 현감은 이에 굴복하여 요구조건을 수락함으로써 군중은 해산하였다. 조정에서는 충청병사를 통해 군대를 파견해 주모자 5명을 체포해 [[효수]]했으며 곳곳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농민들의 기를 꺾으려고 했다. [[부여군|임천]]에서는 봄에 이미 한번 봉기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이때 농민들은 수령에게 정소를 하며 항의했으나 수령이 주모자를 옥에 가두고 위협하자 해산하고 말았다. 5월 17일 [[암행어사]]가 임천에 도착하면서 농민들이 모임을 갖고 봉기 계획을 짰다. 이를 알게 된 암행어사는 미리 방문을 거리에 붙여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은 농민 10,000여 명은 그날 저녁 관청에 모여 암행어사에게 직접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암해어사가 군중에게 폐정 개혁을 약속하자 그제서야 해산했다. 이 봉기는 상당히 온건히 진행되었기에, 조정에서는 주모자에 대한 별다른 처벌 없이 군수에 대해서만 파직 처분을 내렸다. 이외에도 [[청주시]], [[유성구|진잠]], [[논산|연산]], [[진천]], [[괴산|청안]], [[부여]], [[옥천]] 등에서도 봉기가 발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