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일본서기]]의 내용 === 근거 중 핵심적인 것이 고사기 일부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는 320년 즈음 신라를 복속시키고 369년 왜군을 보내어 [[근초고왕|초고왕]]과 함께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임나(任那), 즉 가야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冬十月己亥朔辛丑,從和珥津發之。時飛廉起風,陽侯擧浪,海中大魚,悉浮扶船。則大風順吹,帆舶隨波。不勞櫨楫,便到新羅。時隨船潮浪,遠逮國中。卽知,天神地祇悉助歟。新羅王,於是,戰戰慄慄厝身無所。則集諸人曰,新羅之建國以來,未嘗聞海水凌國。若天運盡之,國爲海乎。是言未訖之間,船師滿海,旌旗耀日,鼓吹起聲,山川悉振。新羅王遙望以爲,非常之兵,將滅己國。警焉失志。乃今醒之曰,吾聞,東有神國。謂日本。亦有聖王。謂天皇。必其國之神兵也。豈可擧兵以距乎,卽素旆而自服。素組以面縛。封圖籍,降於王船之前。因以,叩頭之曰,從今以後,長與乾坤,伏爲飼部。其不乾船柂,而春秋獻馬梳及馬鞭。復不煩海遠,以每年貢男女之調。則重誓之曰,非東日更出西,且除阿利那禮河返以之逆流,及河石昇爲星辰,而殊闕春秋之朝,怠廢梳鞭之貢,天神地祇,共討焉。時或曰,欲誅新羅王。於是,皇后曰,初承神敎,將授金銀之國。又號令三軍曰,勿殺自服。今旣獲財國。亦人自降服。殺之不祥,乃解其縛爲飼部。遂入其國中,封重寶府庫,收圖籍文書。卽以皇后所杖矛,樹於新羅王門,爲後葉之印。故其矛今猶樹于新羅王之門也。爰新羅王波沙寐錦,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仍齎金銀彩色及綾•羅•縑絹,載于八十艘船,令從官軍。是以,新羅王,常以八十船之調貢于日本國,其是之緣也。於是,高麗•百濟二國王,聞新羅收圖籍,降於日本國,密令伺其軍勢。則知不可勝,自來于營外,叩頭而款曰,從今以後,永稱西蕃,不絶朝貢。故因以,定內官家屯倉。是所謂之三韓也。皇后從新羅還之。 > >(중애천황(仲哀天皇) 9년(200년))[* 유의할 점으로, 해당 기록은 중애9년조긴 하지만 중애천황조가 아닌 신공황후조의 기사로 실려있다. 중애천황이 9년 2월 츠쿠시에서 죽고, 신공황후조가 신공1년이 아닌 중애9년으로 선왕의 연호(?)를 이어 받아 시작하기 때문.] 겨울 10월 기해삭 신축(3일)에 화이진(和珥津: 와니노츠)[* 지금의 [[쓰시마 섬|대마도]]로 추정]에서 출발했다. 이때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은 파도를 치게 하였다. 그리고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모두 떠올라 배를 떠받쳤다.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를 따라온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 일로 인해서 천신지기(天神地祇)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신라의 건국 이래 바닷물이 나라 안까지 들어온 일은 아직 없었다. 천운이 다해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나고, 북과 피리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신라왕은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 장차 신라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 전의를 상실했다. >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한다. 또한 성왕(聖王)이 있는데 천황(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내어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백기를 들어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드리우고 두 손을 뒤로 묶고, 도적(圖籍)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부터 길이 천지와 함께 복종하여 사부(飼部: 미마카이)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사이 없이, 춘추로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꺼리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조(調)를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거듭 맹세하여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는 일이 없는 한, 또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가 역류하고 강의 돌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춘추로 조공을 거르거나 태만하여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지 않는다면 천신지기여, 벌을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라왕을 죽이십시오."라고 말하였다. > >이에 황후가 "처음에 신의 가르침에 따라 장차 금은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다. 또 3군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여 오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이미 재국(財國)을 얻었다. 또한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말하고, 결박을 풀어 사부(飼部: 미마카히)의 일을 맡겼다. 드디어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중보(重寶)의 곳간을 봉인하고 도적문서(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문에 세우고, 후세에 표시로 삼았다. 그 창은 지금도 신라의 왕문 앞에 세워져 있다. >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 하사 무키무)[* 고대 일본어에서 하(H)행은 F발음이 났던 것을 주의하면 휘는 Fasa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 미시코치하토리칸키)[* 마찬가지로 하행의 F 발음을 주의.]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縑絹)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조공선을 일본국에 바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이에 고구려(高麗)와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로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는 길이 서번(西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내관가(內官家)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황후가 신라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이 기록은 사실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걸리는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일본서기]]》란 책 자체가 [[위서]]까지는 아니지만 고대 일본제국 및 천황숭배 내용으로 점철되었다. 동기부터가 신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대뜸 접신해서는 '금은비단이 넘치는 나라가 저기 있다' 하니 쳐들어간다. 마침 진구황후가 유복자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애가 막 나오려 하니까 돌을 소매 or 허리춤에 끼우고 주문을 외워 출산을 늦추고, 그렇게 어찌어찌 바다를 건너가니까 신라가 밀물에 잠겨버린다. 신라가 밀물에 잠기자 신라왕이 놀란 나머지 알아서 항복한다.[* 신공즉위전기 200년의 기사를 참고하자. 일본서기의 기술대로라면 서기 200년이지만, 일본서기의 윤색 때문에 연도가 맞지 않자 근초고왕의 사망기록을 교차검증하여 오차 120년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를 [[이주갑인상]]이라 부른다. 그래서 보통 일본서기의 4~5세기의 기록은 120년을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320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고구려의 별칭인 [[고려]]는 장수왕 시절 성립한 국호로 그 당시 있지도 않는 국명이었다. 일본서기에서 7-8세기 일본이라는 국호가 성립되었는데, 그 이전부터 일본이나 천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시기적 오류가 많다. 버전에 따라서는 신라왕의 무릎뼈를 뽑고 돌에서 기게 하다가 목까지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 갈문왕이던 [[석우로]]를 죽인 것을 과장했다. 그리고 신라의 항복을 본 '''고(구)려[* 고려라는 고구려의 별칭 또한 당대에 존재하지 않는 국명이었다. 고구려의 별칭 고려는 5세기 중반 장수왕대에 이르러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와 백제가 지레 겁먹고 항복'''한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국왕이 스스로를 서번 (오랑캐라고) 칭한다.[* 일본서기를 보면 이때, 이주갑인상을 하여 계산한 320년에 최초로 백제와 외교관계를 성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삼한정벌 기사에 백제와 고구려왕이 항복하고 나와 이제부터 조공을 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 신공황후(神功皇后.[[진구황후]]) 가 꽂은 창이 아직도 신라 궁궐 문 앞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약 46년 후의 기록인 366년 기록을 보면 백제는 왜국과 마치 처음 통교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기사가 나온다.[* 물론 366년에도 통교를 맺지는 못했다. 후술한 내용이지만 그 이유는 어떻게 일본에 당도 해야하는지도 몰라서였다.] >卌六年 春三月乙亥朔,遣斯摩宿禰于卓淳國[斯麻宿禰者, 不知何姓人也.]. 於是, 卓淳王末錦旱岐, 告斯摩宿禰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彌州流•莫古三人, 到於我土 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故求道路, 以至于斯土。若能敎臣等, 令通道路, 則我王必深德君王。時謂久氐等曰, 本聞東有貴國. 然未曾有通, 不知其道, 唯海遠浪嶮。則乘大船, 僅可得通。若雖有路津, 何以得達耶. 於是, 久氐等曰, 然卽當今不得通也。不若, 更還之備船舶, 而後通矣。仍曰, 若有貴國使人來, 必應告吾國。如此乃還。 > >(신공 섭정) 46년 봄 3월 을해삭(1일)에 사마숙녜(斯摩宿禰)를 탁순국(卓淳國)에 파견하였다[사마숙녜의 성(姓)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때 탁순왕(卓淳王) 말금한기(末錦旱岐)가 사마숙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갑자년(甲子年)[* 신공 섭정 44년을 말한다. 일본서기 묘사대로라면 서기 244년이지만,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64년이라 하겠다.] 7월 중에 백제인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은 동방(東方)에 일본이라는 귀국(貴國)이있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보내 귀국에 조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가르쳐 통할 수 있게 해준다면 우리 왕은 반드시 군왕(君王)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왕이 구저 등에게 ‘본디 동쪽에 귀국이 있다는 것을 들은 바 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다만 바닷길이 멀고 파도가 거칠어서 큰 배를 타고서야 겨우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에서 백제인이 탁순국에 도착한 시기는 7월이라고 기록 되어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에 당도할때 훈풍이 부는 여름에만 항해 했는데,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항해 할때는 겨울이 적합한 시기임을 알수 있다.] 비록 길이 있다고 해도 어찌 능히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구저 등이 ‘그러면 지금 당장은 건너갈 수 없겠습니다. 다시 돌아가 선박을 준비한 다음에 왕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만약 귀국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 알려주십시오.’라고 당부하고 이내 돌아갔다.” 놀랍게도 상술한 신공 섭정 46년조[* 일본서기 묘사대로는 246년.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66년] 기사와 주아이 9년조 삼한정벌[* 일본서기의 묘사대로는 서기 200년.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20년]의 기사는 같은 일본서기에 서술된 내용이다. 신공황후가 신라를 점령할 때 본인이 직접 나와 항복의사를 밝히고 스스로 서번이라고 밝혔는데, 정작 46년 후에는 마치 왜국과 처음 통교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떻게 당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단지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국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서기의 내용은 뒤죽박죽이고 횡설수설하는 내용이 많다. 이야기 자체가 지나치게 신화 - 전설의 경향이 강한지라 스에마쯔 이후로 이 기록을 믿는 사람들은 그저 [[데꿀멍]]이 되었다. 더구나 [[진구황후]] 본인부터가 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나서 활동하고, 《일본서기》에 일본에 항복하거나 죽였다는 신라의 지배층들은 진구황후의 생존시기와 전혀 안 맞는다. [[진구 황후]] 문서 문서 참조. [[이주갑인상]]을 감안하여, 일어났던 시기를 4~5세기로 상정하고 사료를 분석하면, 일본에 간 인질 미사금이 등장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마저도 당대의 신라왕으로 등장하는 파사매금(波沙寐錦)은 서기 80년쯤에 신라를 다스렸다는 [[파사 이사금]]과 표기가 비슷하다. 파사 이사금이라면 신공황후의 등장기인 3세기 무렵이나 이주갑인상을 감안하여 보정한 4-5세기 사람이 아니다. 후대의 미사흔의 인질 기록을 보고 짜집기 했다고 추정하는 이유. 분명히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정벌한 기사는 신공황후 즉위 전기로 200년 10월 3일의 기사이다. 물론 선술했듯이, 일본서기의 연대기는 신뢰할 수 없고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데, 근초고왕의 사망기록을 대조하고 교차검증을 해보면, 일본서기의 기술이 120년을 끌어올렸음을 알 수 있다. 고로 200년이라고 적혔지만, 실제로 일어났다고 추정할수 있는 연도는 320년이다.[* 자세한 항목은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 항목을 참조] 문제는, 320년의 기록에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정벌 기사를 교차검증 해줄수 있는 자료가 단 한 개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와 [[미사흔]]의 인질 파견등을 거론하며 근거로 내세우긴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는 391년으로 시대차이가 너무난다. 미사흔의 인질 파견도 402년에 일어났다. 백번 양보해서 320년대 인근이 아니라고 치고, 확장해서 4~5세기의 신공황후 활동기로 추정되는 당대의 기록을 삼국사기로 조사하면, 왜국이 신라를 정복한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신라원정을 왔다가 처참히 격파당하고 패주하는 것이 346년, 364년, 393년, 405년 신라본기에 적혀있다. > 三十七年,倭兵猝至風㠀,抄掠邊戸。又進圍金城急攻。王欲出兵相戰,伊伐湌康世曰,「賊遠至,其鋒不可當,不若緩之,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命康世率勁騎追擊走之。 > > (홀해이사금) 37년(346) 왜병(倭兵)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상대하여 싸우고자 하였으나 이벌찬(伊伐湌)강세(康世)가 말하였다.“적은 멀리서 왔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니, 그것을 늦추었다가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여겨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다해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굳센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그들을 쫓았다. > 九年,夏四月,倭兵大至,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倭人恃衆直進,伏發擊其不意。倭人大敗走,追擊殺之幾盡。 > > (내물마립간) 9년(364) 여름 4월에 왜군이 대거 침입해 왔다. 복병으롤 물리치고 그들은 대패하고 도주했다. 한층 추격하여 전멸 근처까지 몰아넣었다 > 三十八年,夏五月,倭人來圍金城,五日不解。將士皆請出戰,王曰,「今賊弃舟深入,在於死地,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歩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 > (내물마립간)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四年,夏四月,倭兵來攻明活城,不克而歸。王率騎兵,要之獨山之南,再戰破之,殺獲三百餘級。 > > (실성마립간) 4년(405) 여름 4월에 왜병(倭兵)이 와서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의 남쪽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격파하여 3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일본서기]]》 자체에서도 문제가 있다. 임나일본부를 일본 [[천황]]의 명령으로 일본이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임나일본부설과는 달리 정작 《일본서기》 본문에는 '가야를 정벌해 임나일본부를 세운 세력은 철저하게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와 백제의 군사들'이라고 기록되었다.[* 정벌은 일본측에서 먼저 하긴 하는데 군사가 부족해서 백제에 원군을 요청하는등 가야를 정복한 주체가 일본 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가야사 연구자인 김태식 교수에 의하면 목라근자와 함께 원군으로 파병간 사사노궤 또한 백제식의 이름으로 백제인이라고 추정한다. 거기다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통제한다면 무엇인가 임나에 요구사항이 있을 경우 그쪽에 직접 명령하면 될 터인데, 뭔가 임나에 요구사항이 있으면 일본은 죄다 백제왕을 거쳐서 간접적으로 얻어내지 직접 요구를 전혀 못한다. 실제로 한일 학자들의 토론시 일본 학자가 태클걸었다가 이 때문에 한국학자한테 데꿀멍당한 적도 있다. 목라근자의 자손은 후에 일본으로 귀순하여 일본 소가씨의 시조가 된다는 가설이 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임나를 자기들의 땅으로 인식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와 소가만지가 동일인물이라는 설은 김현구 학자의 학설로 근거가 미약하다.][* 근거로는 [[소가노 이루카]]의 이름과 관직으로 제시되는 鞍作大郎, 林大臣, 我 入鹿에서 언급되는 작위 鞍作이 扶桑略記에 의하면 백제불공(百濟佛工)이라고 하고, 일본 고대 황족의 족보인 신찬성씨록에서는 林씨가 백제의 목씨에서 나왔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만 목라근자가 가야정벌 기사에 나올때는 백제인이라고 명시 했으나, 그의 아들 목만치는 일본서기 294년 기사에는 大倭의 신하라고 기록되있다. 고로 목만치는 후에 왜로 이주했는데 이것을 소급 적용해서 왜의 관료라는 식의 윤색을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일례로 [[흠명천황|흠명]]천황 4년( 543년) 11월 8일의 가사를 보면, 백제에게 임나에서 백제의 성주와 군령의 추방을 백제 왕에게 부탁한다던가, 또한 일본서기 [[흠명천황|흠명]] 9년(548년) 기사를 보면, 왜왕이 백제왕에게 고구려의 임나 침공에 대비해, 방비를 당부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말버릇처럼 얘기하는 가야는 일본이 통치하는 곳이다. 그런데 왜 가야의 통치자에게 서신을 보내 백제와 협력하라고 말하지 않고 구태여 백제왕에게 서신을 보내 제3자가 구경하듯이 말을 하는가? [[파일:백제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당부.jpg]] <흠명 9년, 548년 6월> > 六月辛酉朔壬戌,遣使詔于百濟曰,德率宣文,取歸以後,當復何如。消息何如。朕聞,汝國爲狛賊所害。宜共任那,策勵同謀,如前防距。 > > 박적(狛賊)[* 박적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狛은 글자 외관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맥|맥족]]이라는 뜻의 貊과 일맥상통한다. [[백제어]]를 통해 왜 貊을 狛과 연결지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데, [[웅진]]이라는 지명을 당대 백제인들이 어떻게 불렀는지 알 수 있는데, '고마나리'라고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있다. 고마는 웅진의 熊=곰에 대응 되는 단어이며, 일본에서는 Kuma이다. 공교롭게도 일본어에서도 고려=고구려를 Koma라고 부른다. 백제나 고구려는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곰을 숭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 모두 맥족이라는 의식이 당대에도 투철했던 것 같다.]이 백제를 침공 했다고 들었다. 임나와 잘 논의하여 이전과 같이 잘 막아라[* 이후에 등장하는 기사가 흠명 10년(549년)에 일본이 백제에 370명을 파견해 득이신에 성을 축조하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서기 601년 (추고9년) 3월 5일> > 三月甲申朔戊子,遣大伴連囓于高麗,遺坂本臣糠手于百濟,以詔之曰,急救任那。 > > 3월 갑신삭 무자(5일)에 대반련설(大伴連囓;오오도모노무라지쿠이)를 고구려에 파견하고, 판본신강수(坂本臣糠手;사카모토노오미누카테)를 백제에 각각 파견하여 고하기를 “급히 임나를 구하라.”고 말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신라로부터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게 급히 사신을 파견해 명령을 하는데, 왜왕의 조칙을 보낸 발송지는 가까운 임나가 아니라 일본 본국이다. 차라리 그렇게 조칙을 보낼 정도라면 일본 본국에 있는 정규군을 파병하는게 나을뻔 했을것이다. 자신들의 군대가 항시 주둔하는 직할령인데 왜 백제와 고구려에게 부탁하며, 고구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부탁할 바에야 자신들이 직접 구원병을 파견하는게 더 빠르고 안전한 방법인데, 역사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일반인들 조차도 논리적로 납득하기 어려운 엉터리 윤색이다. 또 일본서기에서 이르길 임나는 이미 6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멸망했는데, 수십년 후인 601년에 버젓이 살아 돌아온다. 일본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1336~1392)에 《일본서기》와 같은 목적으로 편찬된 신황정통기에서는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설을 기록하면서, 주석에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진구황후에게 복속했다는 것은 조상님들이 삼국을 삼한이라고 불렀던 데서 착오가 있었고, 고로 삼국이 아니라 신라만 지배한 것이다.[* 此三け国を三韓と云ふ。正は新羅にかぎるべきか。辰韓・馬韓・弁韓をすべて新羅と云也。しかれどふるくより百済・高麗をくはへて三韓と云ならはせり]' 이라 기록했고[* 다만 당대에 통용되던 삼한의 뜻은 마한, 진한, 변한 혹은 세 개의 한국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칭하는게 아니라 한반도 남부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삼국사기에도 무열왕의 공로로 삼한일통이라고 나오는데, 명백히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은 문무왕이다. 무열왕 당대에는 백제가 멸망한 직후이므로 고구려는 아직 존속되고 있는 나라였으므로, 삼한이 한반도 남부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다. 자세한 내용은 [[삼한일통]]을 참고하자. 이 경우라면 옛 마한 진한 변한의 강역을 통합함 지역을 삼한이라고 부른 듯하다.], 그마저도 《일본서기》에서 삼국을 삼한으로 본 기록과 중국 사서의 내용을 요상하게 뒤섞어 [[진한]]/[[마한]]/[[변한]]을 합하여 신라라고 부른다고 잘못 적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학계에서는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론에 대해 사로 검증을 통해 비판하는 여론이 있었으나, 제국주의에 덮였다 또 추고 9년[* 601년 3월 5일 기사]를 보면, 임나가 신라에게 침공받자, 뜬금없이 고구려에게 사신을 보내 임나를 구하라고 요구하는 기록도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