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제1차 (2005), 2차 (2010) 한일역사공동연구 보고서의 고대사 부분(제1분과)의 내용과 토론부문 발췌 === 설명에 앞서 보고서는 한일 양국의 각자 개개인의 논문을 투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양측이 상호의 의견에 동의 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서로 자신의 주장을 논문으로 투고했기 때문에 상대측의 의견에 동의 하는지, 동의 할지 않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양측이 서로 각기 다른 쟁점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동감을 이루었는지 알고 싶다면, 보고서의 맨 마지막 부분인 좌담회 토론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토론 부분에서는 매우 직설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갔기 때문에 한일 양측에서 생각하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제2기 한일 역소 공동연구회의 좌담회 토론을 주도한 사람은 한국측의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이고 일본측에서 주도적으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방어한 사람은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 규슈대 교수이다. 김태식 교수가 1) 신공황후 49년(369년), 목라근자와 사사노궤[* 김태식 교수는 사사노궤를 인명에서 백제인이라고 추정하고 보고서 논문에 투고했다.] 등을 주축으로 하는 백제의 가야 정벌은 신공황후와 왜국이 주도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발언하며, 전형적인 의미의 임나일본부설은 붕괴 되었다고 발언. 2)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군은 백제와 왜 양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파견된 용병이며, 가야-왜 연합군 중 복식이나 행색이 이질적인 왜군을 크게 과장했다. 3) 후기 가야의 주도 세력인 고령가야는 6세기에 고대국가의 틀을 잡았기 때문에, 일본학계에서 가야를 약소국 취급하는 인식에 대해 수정을 요구. 이에 대해 하마다 고사쿠 교수는, 신공황후 49년 가야 정벌의 기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이 맞다고 수긍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사와 착각해서 잘못 말했지만 지적 당하고 가야7국 평정이라고 수정했다.] 이에 대해 일본측에서는 왜국이 주도적으로 정벌을 했다고 믿을 순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근초고왕의 가야 평정전에 왜군이 참여 내지는 관여 했을거고 이걸 후대에 자신들이 유리한 기사로 바꾸어 기록 했다고 추정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구 세력이 상당히 과장 되었다는게 통념이긴 하지만, 5만의 군사를 동원한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에서 왜군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가야가 저평가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야가 왜국의 문화 형성에 매우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라고 대답했다. 김태식 교수는 [[사비회의]]에서 성왕이 근초고왕 시절, 백제와 가야는 형제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발언에 주목하며, 근초고왕 치세기 시절 김해의 금관가야와 교류를 하며, 금관가야의 중개를 통하여 백제와 왜가 통교를 맺었다고 발언했다.[* 일견 타당한 이유가 선술된 일본서기에서도 백제가 왜국과 통교하기전에 왜국과 통교하고 샆다며 먼저 찾아간 곳은 가야의 일부인 탁순국이다.] 덧붙여 백제가 칠지도를 보낸 이유를 가야를 평정 할때 왜군이 원조를 보낸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 하마다 고사쿠의 발언을 두고 가야7국 평정에 대해 상당히 사실성이 높다고 평가하는것 같은데 사실이냐고 몰아 붙였다. 이에 하마다 고사쿠는 이에 대해 오해라고 해명했다. 덧붙이자면 김태식 교수는 각자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칠지도를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과 동시대의 유물이라고 발언하며, 6세기경의 물건이라고 추정하였다. 또한 김태식 교수는 투고한 논문에서 관산성 전투에서 파견한 왜군의 병력 규모에 주목하면 1000명 [* 백촌강 전투를 재외하면, 왜군이 가장 큰 규모로 신라를 침공 했을때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462년 기록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신라는 왜군에게 패배하여 1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물론 이듬해에 신라가 반격에 나서고, 그들을 격퇴 시킨다]수준의 상대적으로 소규모 부대가 한반도에서 이산적으로 활동 했을거라고 봤고, 또 그들의 병기나 무기 수준을 언급하며 주력부대는 아니었을거라고 단언 했다. 또 고고학과 수반된 가야-왜국 간의 관계 연구가 임나일본부설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절실하다고 말했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가야와 백제 왜군의 무기 수준이나 착용 갑옷 수준에 대해 심도있게 서술했다 >백제나 가야에 비하여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대에 소급할 수 있는 금촉제마구가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으며,5세기가 되어서야 가야로부터 개별적으로 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본 고분시대의 마구에 대한 연구로서 小野山節는 일찍이 편년 작업을 하여, "오로지 수입품에 의존한 시기"를 설정하고 발걸이 형태의 차이를 가지고 제1기를 구식과 신식으로 나누어 보았다.이에 대하여 中村潤子는 5세기 전반의 제1차 도입기 (구식)에 전해진 한반도 낙동강 하류욕 마구는 결국 일본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끝났으며 5세기 후반의 2차 도입기 (신식)에 검릉형 또는 편원검미형 말띠드리개와 f자형 재갈멈추개로 표상되는 川脥 玉田 계통의 마구가 들어와 그것이 비로소 일본에서 계승 발전되었다고 하였다. 즉 일본에 4세기대의 기마문화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또한 왜는 4세기대에 단검,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 등의 무기를 주로 사용하고 5세기에 와서야 공격구(攻擊具)의 주류로서 장검을 채택할 정도였다.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러므로 왜의 무장은 일부 射兵이 부가되어 있으나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短兵器가 주력이고,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威信財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인다. 출처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pg40.) 그의 견해는 왜국의 부대는 단언코 주력부대가 아니고 소규모 부대로 가야 군대에 편입되어 용병으로 참가 했으나, 복색이 백제 신라 가야와 이질적인 왜군의 부대를 고구려가 크게 과장 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김태식 교수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써져있는 병신년(396년)의 기사를 두고, 왜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 396년 병신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명분이 없다며, 기존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해석론에 의문을 제시하는 내용을 논문에 투고 하였다 [* 앞서 선술된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청동거울과 신묘년이라고 적힌 기록을 두고, 토론회에 참석한 조법종 교수도 왜국 주체설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낸바 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 고로 한국측 주류사학계에서도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왜국 주체설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건 맞다. 다만 확실히 논박할만한 근거가 아직 빈약하기에 아직 조사나 연구가 진행되거나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개찬설을 주장했다가 이미 일부 보기좋게 논파 당했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한국학계의 태도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 학계가 광개토대왕릉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전쟁의 풍파와 급속한 변혁기 등을 거치면서 전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의 광개토왕릉에 대한 조사는 100년이 넘었으니, 지금까지는 수세에 몰렸던게 당연하다. 한국학계가 광개토왕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길어봤자 3-40년 정도이다. ] 제 1차 1분과 고대사 하마다 고사쿠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1k.pdf]] 김태식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이시히 마사토시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3k.pdf]] 노중국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4k.pdf]] 사토 마코토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5k.pdf]] 김현구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6k.pdf]] 제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좌담회 토론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7k.pdf]] 제 2차 1분과 고대사 논문 + 좌담회 토론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